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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6월 28일 : 명승부

 

 

△ 아무리 바빠도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

 

 

 

 

 

신도림역에서 걸어서 이십분이면 친구집에 도착한다. 그건 집주인과 함께 걸었을 때 얘기란걸 오늘 알았네. 데헷. 집주인은 좋은 주말을 맞아 제주도에 가 있고, 나는 빈 집에 가서 티비도 좀 보고 내일 출근을 일찍 할 요량으로 집을 또 빌렸다.

 

 

나 너네집 가도 돼?

그래. 와이파이랑 티비선 빼놨으니까 꽂고.

 

 

함께사는 친구는 오늘도 출근. 마침 내일 회사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 친구의 회사에 들르기로 결정. 오늘 나의 동선은 친구회사 → 삼청동 → 홈플러스 → 신도림이다. 친구회사에서 서류를 뽑고 환승해서 삼청동으로 가서 잠깐 볼일을 본 다음, 신도림역의 홈플러스에 들러 파인애플과 초밥을 사고 친구집에 기어들어가 맥주도 좀 마시면서 일요일 오후를 노닥거리는거지. 동선에 회사도 잠깐 끼워넣을까 고민했으나, 어제도 출근-해서 실컷 떠들기만 했지만- 했고 내일도 출근할꺼니까 오늘은 쉬자.

 

 

친구회사에 잠깐 들러 서류를 뽑고, 친구와 몇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얼른 나왔다. 환승을 해야하기에. 엄마와 나는 아주 예전부터, 그러니까 환승시스템이 도입된 뒤로부터 이상한 '환승부심'을 갖게 됐는데, 어떻게 효율적으로 환승을 했는가가 늘 서로의 자랑거리다. 엄마의 베이직 코스를 예로들면 이런식. 집에서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본 뒤, 다시 환승을 해서 어디를 갔다가 두근두근하며 카드를 태그했는데, 또 환승이 되어서 집으로 왔다.

 

 

3환승에 성공한 엄마의 낯빛은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 이게 뭐라고 우리는 십년도 넘게 질리지도 않고 서로의 환승력(?)을 자랑하고 있나. 나중에는 환승에 도가 터서 이런 정도도 가능해졌다. 친구들과 어딘가로 소풍을 가는 날. 집에서 버스를 타고 마트에 내려 장을 본 뒤, 다시 환승을 하고 소풍장소로 향할 수 있다.

 

 

게다가 어제부터 서울시는 버스요금이 올랐다. 고작 몇 백원이라고해도 숫자 바뀌는 속도가 배로 뛰니까 기분이 언짢아지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은 4환승이 가능하지 않은가. 친구의 회사에 들러 무사히 서류를 뽑고 버스를 탔는데 아차. 환승이 안되는거다. 1분에서 3분정도 늦은 것으로 추정. 좌석에 몸을 파묻고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네 개가 세트인 빵을 샀는데 하나 집자마자 간발의 차로 세 개를 맛도 못보고 떨어뜨린 그런 상황이 아닌가. 나의 환승부심에도 치명타다. 이것은. 혼자 조용히 오늘의 동선을 짜면서 '그래, 오늘 한 번 해보자' 혼자 불꽃다짐을 했다. (참 쓸데없다)

 

 

이 버스를 타고 시청에서 내린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삼청동에 내려 볼일을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공덕역으로 간 뒤, 공덕에서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으로 가자.

 

 

그리고는 이 스케줄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환승을 하기위해 갖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 이 더운 여름날에. 시청에서는 동성애 반대집회가 있어 꼼짝할 수 없었고, 1시간여를 밀린 뒤에야 겨우 시청에 내릴 수 있었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삼청동 파출소. 볼일을 보고는 타고 왔던 마을버스와 겹치지 않는 번호를 찾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버스를 타는 도중에 떡꼬치집이 있어 바쁜 와중이었지만 포장을 세 개하고, 옆가게의 옷도 한 번 보고 다시 열심히 걸어걸어 환승 성공. 서울시 환승시스템을 상대로 한 나의 외로운 싸움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했다. 훗. 버스에서 승자의 갖은 여유를 부리며 떡꼬치를 하나 재빨리 먹어치웠다. 지하철 타기도 성공. 훗. 강남에서 삼청동을 거쳐, 공덕을 지나 신도림으로 이르는 멋진 경로였다. 그러나 신도림역의 마트는 오늘 휴일.

 

 

여기서 그냥 적당히 하고 싸움을 끝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신도림역에서 친구의 집은 지하철 한 정거장이기 때문에 지하철만 탄다면 금방 찾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온 승부인데, 승부의 마지막에서 돌연 패배를 선언할 순 없지 않은가. (지하철에서 지하철은 환승이 안된다.) 어차피 전에도 신도림역에서 친구집까지 걸어가본 적이 있고, 이십분이면 도착했던 걸로 기억해 걸어가보기로 했다. 길치 주제에! 승부에 눈이 멀어!

 

 

분명 신도림에 도착했을때는 하늘이 하앴고, 심지어 여름은 낮이 길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십여분 걸리는 길을 왜 두시간도 넘게 헤매고 있는가. 이것도 능력이라면 정말 능력이다. 신도림 고등학교는 똑같은 길을 세네번 왔다갔다하며 어찌어찌 찾아냈는데, 신도림 고등학교에서 친구집을 찾는데만 꼬박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온갖 포크레인과 공사장과 어느새 어두워진 골목길을 덜덜 떨며 지나서는, 핸드폰 배터리도 거의 없어지고 울 것같은 마음. 신도림 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못가겠다. 나중에 어찌어찌해서 친구집으로 가는 골목을 찾아냈을 때, 참 어이없게도 친구가 사는 건물이 신도림 고등학교 바로 뒤에 붙어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친구집에 겨우 맥없이 도착했을때는 밤 열시가 넘어있었고, 그럼 두 시간 반을 헤맨건가. 여유롭게 쉬겠다며 찾아든 친구의 집이었는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신도림역에서 너의 집까지 두시간 넘게 헤맸다'는 사실을 전했다. 뭐 한 두번도 아니긴 하지만. 나는 오늘 왜 갑자기 꾸민거지. 오랜만에 여유도 생기고 마음도 생겨서 샤랄라 원피스도 챙겨입고 예쁜 신발도 신고, 속눈썹도 올렸는데 립스틱도 살짝 바르고. 발은 온통 물집이 잡혔고 샤랄라 원피스는 처참한 땀범벅이 되었다.

 

 

서울시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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