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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노래의 날개 위에

뮤지컬 영웅 : 안중근, 서른 한 살이라...

 

 

 

 

△ 네 생각이 나는구나.

 

토요일에 아파서 하루종일 집에 누워있다가, 일요일 점심 때 에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영웅>을 보게 되었다. 이걸 보게 된 계기가 좀 웃긴데, 여기서 썰을 다 풀수는 없지만 소개팅 땜빵을 하게 된 것. 인연없는 서울땅에서 '소개팅'하기도 박한데 '소개팅 땜빵' 씩이나 할 줄이야. 인생은 참 이래서 신기하고 웃기나보다. (웹툰 <위대한 캣츠비> 한 장면이 퍼뜩 떠오르기도 했고.)

 

 

사이다만 가슴으로 마시나?

역사도 가슴으로 배운다

 

깔끔하게 공연만 같이보면 된다고 해서 '그러마' 하고 흔쾌히 OK. <영웅>을 몰랐는데, 이거 꽤 오래전부터 한 유명한 뮤지컬이라고 한다.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의 독립투쟁을 다룬 뮤지컬인데, 내용은 국사책에서 닳도록 외워서 뻔하지만 '감정'을 담아서 역사를 찬찬히 훑어본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시간이 지나니 너무 아쉬운 점이 많다. 정말 한창 말랑하고 말랑한 가슴들에, 머리로만 자꾸만 뭔가를 집어넣으니 가슴까지 소화시킬 시간이 전혀 없었다! 머릿 속에 구겨넣은 단편적인 지식들이 사실은 가슴을 위한 것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그때는.

 

나는 암기에 꽤 능한 편이라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은 정말 자신있었는데, 국사도 나에게는 외워야하는 짜증나는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윤봉길 = 도시락 폭탄' ,'안중근 = 손가락 절단' 중얼중얼... 왜 그 때 한번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품에 폭탄을 품었고, 어떤 마음으로 손가락을 잘랐는지 왜 한번도 헤아려보지 못했을까? 왜 그들이 그때 몇 살이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그럴 겨를이 없었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긴 했지만 (반 애들 이겨먹기도 바빴다. 그게 그 땐 내 인생 전부인 줄 알았으니.) 정말로 역사는 국사책으로 배워선 안되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국가에서 이러한 역사 뮤지컬이나 연극 등을 많이 만들어서, 초중고 의무과정으로 반드시 보게 하면 좋겠다. 아이들이 극을 직접 꾸미면서 참여도 하게 한다면 정말 좋을텐데. 그러면 정말 무슨 수학 공식처럼, 삶에서 하등 쓸모없는 단편적인 찌꺼기 지식들로 역사가 다가오진 않을텐데.

 

어른들이 지금 대학생들을 가리켜 '우리때는 안그랬다. 요즘 대학생들 국민 의식이 없다. 생각이 없다' 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커왔지는지를 보면 그렇게 쉽게 손가락질만 할 일이 아니다. 한번도 가슴에 역사의식, 국민의식을 품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갑자기 "너희는 성인인데 왜 그만한 의식이 없어?" 라고 다그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컸다. 국민학교 때 '민비 시해 사건'을 배울때도, 아무도 시해가 무슨 뜻인지 말조차 해주지 않았었다. 살해와 시해의 의미조차 모호한 아이들인데 '시험에 나온다' 니까 달달 외울뿐이다.

 

 

새파랗게 젊은 안중근을 떠올리며

 

나는 극을 보면서, 거기서 떠들면서 나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콩알만한 아이들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부러웠다. '너희들이 지금 얼마나 좋은 교육 현장에 와 있는지 아니~?'

 

중간 쉬는 타임에 화장실 옆칸의 대화를 듣게 됐는데, 꼬맹이가 엄마에게 "엄마, 엄마, 근데 이토가 왜 죽어?" 이렇게 종알종알 묻는 목소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배두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어릴 때 무조건 엄마가 공연장에 끌고 갔단다. "졸아도 거기 가서 졸아!" 그게 어릴때는 싫었는데, 지금 커보니 얼마나 큰 삶의 자양분인지 알겠다고 했었다. 암, 삶과 역사는 이렇게 배우는거지. 보고, 듣고, 느끼면서 온 몸으로.

 

극은 안중근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그때의 안중근 나이가 서른 한 살이란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철저하게 없는, 그야말로 철없는 소리로 가끔 나의 혈압을 솟구치게 했던 옆의 소개팅 남 나이가 공교롭게도 서른 한 살이었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을 탓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말 새파랗게 젊었을 안중근을 비로소 떠올려보면서 '그 어린 나이에 목숨바쳐 조국을 짊어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대학시절 하얼빈에서 유학할 때, 어머니와 함께 들렀던 안중근 기념관도 별 의미없었고, 일본인이 중국인 생체 실험을 했던 그 부대도 의미없이 사진 한 방 찍는 곳으로 여겨졌었다. 내가 정말 어렸구나. 철이 없었구나.

 

어릴 때 시간적,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부지런히 버스를 타고 이 곳 저 곳 온갖 전시회는 끌고 다니고, 자막 영화를 보게 하고, 어마어마한 책을 사다주시고, 지금도 어딜가든 박물관을 먼저 찾는 어머니의 안목에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철없었던 시절을 새삼 깨닫게 해준 <영웅>에게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