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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이 악물고 냉장고

 

△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남에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자취방에 작은 냉장고 하나가 있다. 전 세입자가 이사를 나가면서 '쓰던 냉장고가 소리가 많이 나니 새걸로 바꿔달라고 하세요' 하고 팁을 주어서, 이사 들어오면서 냉장고 바꿔달라고 찡찡거려서 바꿔 낸 냉장고이다. 그러나 직장인의 삶이란게 다 그렇지. 한 번 들어찬 냉장고는 언제 비워질지 그 소식이 요원하다. 아침 안 먹지, 점심 회사에서 먹지, 저녁 역시 야근 때문에 회사에서 먹지. 겨우 주말 오전이나 슬쩍 냉장고를 들춰볼까 하기 때문에, 다른 자취생들 하는 마냥 냉장고에서 음식물을 천천히 썩히는 것이다. 아니면 냉동고에서 음식 쓰레기를 보관하던가. 특히 엄마가 가끔 보내주시는 박스때기 사과는 처치곤란이라 정신차리고 보면 늘 밑동이 시커멓게 썩어서 굴러다니는데, 그럴 때마다 '아 김치 냉장고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절박한 기도가 슬금 피어오르지만 자취방에 김치 냉장고를 산다는 것도 사치라 -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공간 문제. 그리고 이사 때의 번거로움과 비용 문제 역시 크다 - 늘 몇 년째 김치 냉장고를 소원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복도에 방치된 '전 냉장고' 즉, X 냉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끙끙거리며 냉장고로 복도 바닥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발등도 몇 번이나 찍어가며 방으로 무사히 들여왔으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냉장고 플러그와 콘센트의 입맞춤 현장을 지켜 보았으나,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입자의 말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쉴 새없이 닥닥 긁는 소리에 여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게 아니라서, 잠을 설치기도 여러 번. 요즘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하루의 절반 이상을 냉장고 소리와 보내야 할 때도 많은데 정말로 적지 않은 피곤이 몰려와 급기야는 콘센트를 뽑아버리기도 했다.

 

 

조금 전, 바쁜 와중에 필요한 서류가 하나 있어 동생에게 부탁했더니 '이 악물고 버텨보자 화이팅' 이라는 결연한 문장이 함께 도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에 집중하면 늘 입술을 꽉 깨무는 버릇이 있어, 벅찬 무언가를 끝내고 나면 입술에 찐한 이빨 자국이 아로새겨져 있기 마련인데 역시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더라. 메일을 열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웃었다. '웃으면서 버티면 안되겠니?' 라고 다시 답신을 보냈지만 확인 후 답장이 없는걸 봐서 녀석은 이 악물고 버텨야만 하는 시기를 지나는 중일게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결국 남에게 한다고 하니까. 이렇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피식 웃었다가 하는 와중에도 저 놈의 냉장고, 지치지도 않고 닥닥 신경 긁는 소리를 내고 있다. 냉장은 잘 되는건가, 한번씩 의심스러워 문을 열어보면 근근이 냉기는 유지하는 상태. 저 녀석도 어쩌면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려나.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라 자꾸 드드득드드득 닥닥 이빨 가는 소리가 나는건가. 아직까지의 쓸모를 어떻게든 증명해볼 요량으로? 그렇다면 응원해줘야지. 삶은 증명의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과정이니까. 나도, 저 냉장고도 웃으면서 버텨 보아야지. 우리가 천년만년 같이 살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곧 헤어질 인연이니, 지금의 동거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함께 버텨보자꾸나. (그렇지만 소리는 정말 거슬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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