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초 영금정
하루종일 잠을 잤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 세상 여기저기를 슬금슬금 돌아다니기에 딱 이었겠다만, 잠에 푹 잠긴 눈으로 창밖을 애달프게 바라보다 다시 까무룩 잠에 빠진다.
저녁이 되어 그제사 기운을 차리고 바깥으로 나가보려는데, 복도 출입구에 종이 하나가 붙어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열흘 남짓 남은 국가고시 때문에 다른 세입자들의 양해를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종이를 들여다보는 와중에도 어느 집에서 삐져나오는 티비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으니...)
무심한 티비 소리에 혀를 끌끌 차며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려는데 아 잠깐, 오른쪽 귀퉁이에 끄적인 여섯 글자에 다시 눈이 간다. '화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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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보러 속초에 다녀왔다. 새벽 일찍 출발하면 해를 보려는 무리에 갇혀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친구의 판단 아래, 31일 밤을 틈타 속초로 향했다. 톨게이트에서 정산을 하는데, 정신없이 잔돈을 거스르느라 바쁜 손길에 대고 문득 새해 인사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바쁜 손길이 잠깐 멈추고, 기분좋게 놀란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감사합니다!" 하루종일 이 많은 차들이 여기를 통과하지만, 이 중 적지않은 이들이 새해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겠지만 아무도 새해 인사를 건넬 생각은 하지 못했던게다.
31의 초조한 끝에서 초시계까지 켜놓고 다시 다가온 1을 축하한 뒤 옅은 잠에 빠졌다가 벌겋게 번진 창밖의 햇살에 놀라 허둥지둥하다 간신히 떠오르는 해를 봤다. 오랜만이다. 새빨간 해가 둥실, 재빠르게 떠올랐다. 햇님 영접을 위해 여기저기 빽빽하게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에도 잠깐이지만 어떤 격양의 빛이 둥실, 재빨리 떠올랐다. 올해는 어떻게 보내겠다는 저마다의 다짐과 이루고 싶은 바람 같은 것이겠지. 나는 해를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곁에 서있던 친구에게 사람들은 매일 '해 타임' 을 가져야 하는거라고, 커피 타임 같은거 말고 해 타임을 가져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것 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매일 매일 해 타임을 가지게 되면 새해의 해돋이는 여전히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그저 그런 여느 날의 해가 될까.
해를 보고 난 뒤, 부산하게 뭔가를 먹고 마시는 거대한 인파를 헤치고 나와 걸었다. 배를 가른 오징어나 생선 따위가 커튼처럼 여기저기 널려있는
바닷가를 조밀조밀 걸었다. 오랜 시간의 햇살과 소금기 실린 바람을 주름마다 가득 품고 있는 얼굴을 스치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라는 목소리가 나를 붙든다. "하는 일 다 잘되고, 운수대통 하시게!"
1월 1일의 늦은 밤. 꾸역꾸역 밀리는 도로 위에서 몇번이나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면서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월 1일이 얼마 남지 않아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을 다 써버리고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새해 복을 건네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왜 이 도시에만 들어서면 모두의 얼굴은 무참해지는건지.
31의 끝에서 눈을 부릅뜨고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내 방으로 돌아와 2016년 1월 1일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늘, 복도에 붙은 '화이팅 하세요!' 한마디를 보고 그 아래 나도 뭔가 슬며시 써넣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