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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유, 의미

 

△ 2년전 가을 불꽃놀이.

시간은 이렇게 무심히 지나가는구나. 나도 이 사실에 이제는 좀 무심해 져야하는데. 무심해질 때도 됐는데. 도통.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를 기어들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고 사이의 어느 즈음에 어느 책에서 읽은 농이 하나 있다.

'하루에 딱 두 번 맞는 시계가 있고,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시계를 사겠습니까?'

 

 

오늘은 하루종일 대청소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찬장을 와 엎어놓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을 좀 자다가 배가 고파져 일어나 뭔가를 겨우 챙겨먹고는 또 신발장을 와 엎었다가 순식간에 더러워진 방을 몰골을 보고는 이맛살을 딱 찌푸리며 다시 에라 모르겠다, 가 되어 잠을 좀 자다가 다시 또 일어나 어딘가를 와 엎어놓는 식이다. 하루종일 이 짓을 반복했다. 집 구석구석에 숨어 몰래 공간만 차지하던 박스며 비닐 따위를 이만큼이나 끄집어냈고, 곰팡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자가증식하는 빨래를 왕왕 무서운 기세로  돌렸으며, 쓰레기 봉투도 꽉꽉 채워 모든 것을 내다버릴 요량으로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비로소 집에서 한발짝을 내왔다. 어 추워. 높지않은 빌라이지만 쓰레기의 양이 많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유독 벽면에 부착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동파의 위험이 있습니다. 수도꼭지는... 보일러 온도는...' 어쩌구저쩌구. 이 건물에 이사온 것이 지난 여름이었으니, 여름내내 봐오던 글귀였는데 드디어 글귀가 계절의 아귀와 맞아떨어지면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1년 내내 붙어있지만 겨울이 되어야만 비로소 맞아 떨어지는 글귀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오래 전의 그 농이 생각 난 것이다. 나는 당연히 두 번이라도 맞는 시계를 골랐지만, 정답은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다. 두 번이라도 맞는 시계는 정지된 시계이고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는 꾸역꾸역 미세한 오차를 보이며, 어쨌든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시계란 말씀.

 

 

오늘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대청소하는 꼭 같은 양으로 책을 읽었다. 책장을 끝에서부터 슬금슬금 파먹어 놓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을 좀 자다가 일어나 또 가운데를 뒤적뒤적 하다가 어딘가를 와 엎어놓는 식이다. 어쨌든 대청소를 마쳤으니 책도 다 읽은 셈이 되었다.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사랑에 관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책' 이라고 짧은 감상을 적어두었다. 지금은 조금 수정하고 싶다. '사랑에 관한 거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책'.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엇갈림이잖아, 석원아. 인생이란 게 그렇잖아." (p.349)

 

 

 

째깍째깍 엇갈림. 열심히 엇갈림. 줄곧 엇갈림. 평생 엇갈림.

그러니까 사랑은 어쩌면 시계 같은 거겠지? 다들 한 번이라도 맞는 시계가 옳다고, 의심없이 시계를 고르지만 사실 그 시계는 영원히 가지 않는 시계였다는 걸 알아버리는게 사랑이겠지. 상대방은 움직이지 않는데 나만 하염없이 째깍째깍 하루를 돌다가, 딱 두 번 맞아떨어지면 박수를 치며 뛸듯이 기뻐하는게 사랑이겠지. 그 사람과 나는 도통, 도무지 한 번을 맞질 않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동안 그 열심한 불평이 끝내 사랑임을 알아채는 것이, 혹은 기어이 모른척 하는 것이 사랑이겠지.

 

 

지겹고 신물나고 의미없음이 반복되는 와중에, 문득 겨울이 와서

수도꼭지와 보일러를 당부하는 메세지가 나에게 꼭 맞는 아귀가 되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겠지.

 

 

문득 당신이 와서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나에게 꼭 맞는 아귀가 되는 것.

평생에 딱 한 번이라고 해도, 한 번이라도 맞는 당신이 옳다고

바보짓인줄 알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당신을 덥석 품는

그것이 사랑, 나의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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