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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6월 9일 : 아랑곳이 어느메요

 

 

노련해 노련해. 물만 쭉쭉 빼던 지난번과는 달라.

 

 

눈뜨니 일곱시 반. 엌. 평소보다 한 시간 늦었다.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가 서둘러 온몸에 물부터 적시고 보는 대역죄인. 어제의 출근길 대부는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했다. 책 잡긴 커녕 책 잡힐 판. 세포들아 깨어나라! 츄아아아아! 엊저녁 친구가 운동을 간다길래 따라나갔다가, 서래마을을 끼고 동네를 장장 세시간이나 돌며 쉴새없이 노래를 불러댄 것이 화근. 누가 먼저 시작했던가. 쥬얼리의 <니가 참 좋아>부터 시작해 룰라, 언타이틀, OPPA, 가라가라갇혀확갇혀~샤크라, 클릭비, UP... 8090 가수들이 손에 손잡고 쏟아진다. 둘이 짝이 안 맞으면 금세 시들해질법한데, '이 노래 뭐였지?' 라고 첫 소절만 불러줘도 바로 춤이 나오는 놀라운 인체의 신비. 우리의 밤은 추억 버프를 타고. 쓰리! 포!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이~ - 친구는 몸을 움직여야 노래가 구현되는 사양의 소유자라서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이었다. 바구니 하나 놓아주고 싶더라만 - 흥에 겨워 목소리가 절로 커지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볼륨이 줄어든다.

 

- 친구 : 야 니 쪽팔려서 소리 줄이는거가

- 나 : 아인데. 내가 언제

- 친구 : 괜찮다 자들 고등학생이다. 우리 노래 뭔지 모른다.

- 나 : 그래? (다시 커지는 목소리)

 

남의 동네 잠시 눌러살면서 옛날사람 인증은 다 하고 다니는구나. 이 밤에 장필순씨까지 모셨다가, 5060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이제는 물건너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 아예는 벤치에 눌러앉아서 노래를 뽑기 시작했는데, 문득 혹부리 영감 노래 주머니가 생각난다. 하나 사서 달아야하나.  

 

 

*

 

 

어제의 출근길 대부는 잠시 출근길 대역죄인이 되는 듯 했지만, 모든걸 포기하고 머리에 물기만 쭉 짠뒤 출근길에 오른 덕분에 심지어 어제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지하철에서 나와 마주서있던 여자는 '아니 그런 꼴로' 여섯 글자를 담은 놀란 눈동자로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교양있게 어제의 책을 꺼내들었지만, 사실은 아랑곳이 어느 곳인지 알기만 하면 당장 찾아가서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로 아랑곳하고 싶은 심정.

 

 

*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15분이나 일찍 도착한 뒤 - 그럼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잖아! - 처참한 심정과 여유를 맞바꿔먹은 돌체 구스토 피취 아이스튀. 마시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