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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계속해서 5월 26일 : 서사정리도 계속해서

 

△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혹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서히 혹은 삽시간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릴테지만.

 

 

 

기다리는 전화 한 통이 있어서 낯선 번호가 울릴 때마다 온통 덜컥거렸다. 오늘 오후 다섯시에 오기로 한 가스검침원의 이른 방문을 알리는 전화였으며, 새벽에 문득 구입한 얼마전부터 몹시 읽고싶던 시집의 도착을 알리는 전화였다.

 

짐을 싸는둥 마는둥 어지러운 물건들 사이에 어설프게 쭈그리고 앉아 시 몇 편을 읽기 시작했다. 방 한 귀퉁이에 빼곡쌓인 책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또 짐의 무게를 늘이고 있다니. 오랫동안 읽지도 않던 시는 왜 또 갑자기 읽겠다는건지는 알 턱이 없다.

 

짐을 싸다말고 종이박스 몇 개를 구해다주기로 한 친구에게 '나 좀 구해줘' 라는 SOS를 보냈더니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며 전화가 왔다. 아 저 박스 좀 구해달라구. 헤헤. 구해달라는 말이 그거였냐면서 친구가 웃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근사한 플라스틱 박스를 구했노라며 메세지를 보내왔다. 고마운 것.

 

종이박스를 구하러 해질녘에 잠시 밖으로 나가보았는데 역시나 종이박스는 할머니들의 잇템으로 자리잡은지 오래 아니던가. 동네를 잠깐 휘 둘러보고는 얼른 집으로 들어왔다. 지는 해에 나뭇잎이 너울너울했는데 동네풍경이 새삼 예쁘고 좋아보인다. 굳이 이 골목에 서사를 새겨 넣어본다면 '먹고 살기 위해 3년동안 꼬박꼬박 왔다갔다 했노라' 정도가 되겠지. 1년을 52주라고 잡고, 보통 주5일을 근무했으니 출퇴근의 기록만 꼽아도 한 해에 오백이십번을 디뎠구나.

 

어디로 가게될진 알수가 없지만, 나에겐 온도같은 고마운 집. 설은 서울풍경에 자그마한 온기를 불어넣어주던 내 작은 방.

 

내 작은 방과 연애감정에 휩싸여 있는데 고향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슈. 짐 싸. 짐은 갑자기 왜. 이사가. 어디로. 몰라 어쩐일이냐. 야 있잖아...'야 있잖아...'로 시작되는 친구의 하소연은 본격 결혼 준비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이 놈 맞춤법이 나에겐 제일 어렵습니다. '금세'보다 더 이상하고 적응안되요. 발음기호도 어렵고. [맏딱뜨리다] 라니- 이러저러한 것들에 관한 것. 야 오늘 예물을 했는데. 예물이 뭐고 돈 주는거?. 아니 그건 예단이고 반지같은 그런거 했다고. 오 예쁜거 했나 티파니 뭐 그런거?. 아니 그냥 보다보니까 다 그게 그거라서...다이아를 3부를 했는데... 아 다이아 크기를 '부'라고 하거든. 오 다이아~. 근데 내가 3부를 했는데 말이야...

 

나도 딸이긴 하지만, 딸가진 부모 맘을 알턱이 있겠나이까. 내 딸이 어때서! 딸부심에 맞서는 우리 아들이면 괜찮지! 아들부심이 만나서 불꽃대결 벌이는게 또 결혼이니까. 왜 다이아를 3부를 했냐, 5부로 해라. 예물은 몇 세트 해준다고 하더냐, 다른 집 딸내미들은 다 그 정도는 받았다더라. 엄마 등쌀에 들들 볶이는 것도 서러운데 시엄마는 '무엇이 갖고싶다'며 노래를 부르신다고 하니.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해가자는 내 친구건만, 왜 내 돈주고하는 예물에도 이렇게 서러워야 되는거냐며 끝끝내 본인이 정작 갖고 싶었던 팔찌는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못 사고 나왔단다. 쩝.

 

쉽게 말할수도 없는 것이, 친구 중의 하나는 시댁과 돈이 왔다갔다하는 절차 중에 서로가 마음을 크게 다치고 결국에는 결혼까지 어그러지지 않았던가. 겪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겠다. 아무것도. 결혼이란 단어랑 엮일때마다 자꾸만 무겁고 두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무래도 결혼을 둘러싼 한국의 정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고하니 언젠가 마주하게 될 나의 결혼은 아름답고 원만하길 또 바라고 바라며.

 

남편될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이제 막 시작한 결혼준비에 대한 부침을 토로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쓰럽기도 해서 '야 결혼 화이팅! 나는 성공적인 이사와 취직과 연애까지 해결해야 될 상황이라고. 나를 생각하며 힘내라." 라고 북돋아 주었다. 정말로 위안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나를 걱정해주는 저 멀리의 목소리가 고맙고 다정하다. 어디로 가려고. 모르겠는데 일단은 짐은 싸고 있어. 그 집에 더 있으면 안 되나. 굳이 안될 것도 없었는데 그냥 나도 이 방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음. 정리하고 또 새롭게 시작하면 뭔가 답이 보이겠지! 일단은 나의 정신적인 허세정도로 음하하!. 이 방에 얽힌 서사를 정리하고 싶어서라는 말은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니 결혼하기 전에 여행이나 한번 가자. 어디로?. 예전 추억을 생각하면서?. 우리 다같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함께 갔던 여행을 떠올리며 말했더니, '아 진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아. 무작정 이 녀석을 끌고 덜컥 여행을 가자며 배를 태워 진도라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그날 마침 유조선이 터져서 배에서 인터뷰를 하고 친구한테는 욕을 들어먹었던 2008년도 무렵의 그 추억. 잊지 않았구나. 원 몰 타임?

 

 

 

(*) 오늘의 대박사건. 작년 초 무렵에 미친듯이 빠져있던 분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뜨악 그리고 맘 속으로 꺄아. (다행히 그 분은 나의 존재를 모른다. 다행인건가? 아 갑자기 눈물이...) 오. 인턴에서 정직원이 된거구나. 실제로 보니까 생각보다 작고 굉장히 말랐더라. 연예인보는 기분.

 

선배한테 '나 대박!' 이라고 보냈더니 들어보지도 않고 취직축하를 해준다. 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