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날씨

2015년 5월 26일 : 새벽. 뭐야 이 새끼는? 이라는 심정이 되었다

 

△ 자. 당신은 음악으로 친다면 어떤 음악인가요?

 

 

 

새벽 네 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자기는 다 틀렸다. 그래도 두시 무렵에는 누운 것 같은데 웹툰을 좀 살펴보고는 - 나에겐 웹툰이 담배같다. 이걸 끊으면 삶의 질이 아주 그냥 확 높아질텐데. 일찍 자지, 눈에 무리 안 가지, 핸드폰 덜 붙잡고 있지. 이걸 끊어야 해 - 서울살이의 팍팍함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봄눈별'이라는 한 남자의 기사를 읽게 됐다. 서울에서 월 60만원으로, 면도기 하나를 15년째 이어쓰는 삶에도 사람들의 욕설이 배설된다는게 신기해서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 씨의 글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실소가 터질 지경인데,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성과 그 수준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코 나 잘났다고 하는 글이 아니니, 혹시나 오해는 마시라. 나도 우매한 국민일지언대.)

 

'봄눈별' 이라는 사람의 블로그에 가 보았다. 이러저러한 글들이 있었고, 여태 그가 걸어온 삶의 조각들이 가지런히 모여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도 있었고, 몇 편의 글을 읽으며 '올해는 채식과 기타를 제대로 한 번 시작해보리라.' 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문득 노래 하나가 듣고 싶었다.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근사한 노래인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가사를 붙인 곡이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넣어 다녔는데, 오늘에서야 문득 듣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노래의 제목을 두드려 보았더니 한 사람의 블로그가 걸렸다. 그 노래를 대중 앞에서 두번째로 공개한다며, 곡에 얽힌 탄생 비화와 이러저러한 느낌들을 설명하는 가수의 동영상이었다. 가수가 곡을 금방 썼다며 "가사에 멜로디가 들어있던 것처럼." 이라는 말을 했다. 근사한 표현. 멜로디를 품고 있는 가사라니. 거 참.

 

노래의 탄생 비화를 듣고, 노래를 들었다. 아. 노래는 사실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사만 읽었을 때가 독보적으로 아름다왔다. 내가 아무래도 활자에 유독 민감한 인간이어서 그런갑다한다. 이만한 느낌의 가사에는 이정도 선율이 붙어줘야 되는데, 이정도 선율이 뭔지 나는 구현해낼 방법이 없어서. (긁적) 다른 날 다시 들으면 또 다른 느낌일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노래에 대한 감상은 이만.

 

아무튼 블로그의 주인이 여기에 살을 붙여놓은 글이 있는데, 이게 예술인거다. 아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구나. 참 생각을 글로 잘 푸는구나. 멋지네. 여기까지면 좋았을텐데 이 사람이 나랑 똑같은 가수를 제일 좋아하는거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 즐겨듣는 철지난 노래가 있는데 그걸 또 같은 시기에 듣고 있네? 글도 잘 쓰고 사진도 잘 찍는데다가, 나랑 똑같은 작가와 음악가를 좋아하고 내가 최근에 듣는 철지난 노래를 비슷한 시기에 듣고 있네? 남의 귀한 집 자식에게, 뭐야 이 새끼는! 이라는 심정이 되어 불을 벌떡 켰다.

 

왠 유난? 이랄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성향 자체가 개인주의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고 자기만의 세계를 쌓는데 일생을 거는 사람이다. 나도 예전에는 내가 도무지 왜 이럴까 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많은데, 사람 성향 자체에 대한 공부를 해보니까 왜 그런지 알겠더라. (그냥 그렇게 세팅이 되어있어요. 내가.) 아무튼 난 내 식대로 은밀하게 나만의 취향을 수집하고 쌓아올리는데 인생의 꽤 무거운 몫을 지불해온 사람인데,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칠밖에. 게다가 작가도 가수도 노래도 상당히 매니악하다며 자부하고 있었건만! (몹쓸 레어부심 같은거.)

 

나는 그냥 흔한 카테고리의 하나가 아닐까? 그냥 그런 카테고리의 사람들은 그런 글을 읽고, 그런 음악을 듣고, 그걸 다시 글로 풀고 그러면서 사는거야. 그리고 깜짝 놀라겠지만 그 카테고리의 사람 모두는 나와 똑같은(혹은 상당한) 취향을 공유하고 있지. 나만 몰랐네? 음하하하(흠칫)

 

주인장이 궁금해져 블로그를 털어보니 짤짤 털 것도 없이 나이며 연애사 따위가 즐비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살 정도 많은 것 같고, 남자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있고, 마지막 연애는 사년전이었고, 소프트웨어는 몹시 내 스타일이지만 아쉽게도 하드웨어는 반비례하고. - 다행이다. 이건 마치 그 기분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보면 줄리아 로버츠가 말도 안되는 남자와 연결된다. 내가 외양에 많이 약한 사람이긴한데, 어쨌든 그 스윗하고 섹시한 남편도 버리고 사슴같은 눈망울의 요정같은 썸남도 버리고, 하필 그 두툼한 산적같은 남자에게 안길게 뭐람. 그 영화를 보면서 엔딩에서 절규했다.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제발. -

 

 

 

 

 

△ 오죽하면 영화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진들을 찾아왔다. 영화가 망한 이유에 한 몫 했을거여.

판타지를 채워주려면 제대로 채워주라고!

 

 

 

하여간 블로그의 주인이 내 (외적)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정말로 내 스타일이기까지 했으면 어떻게서든 찾아내서 '나 너 좋아하냐' 라고 고백할 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굳이 얼굴을 마주보며 시간과 공간을 쪼개쓰진 않더라도 좋아하는 음악과 글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나누고 싶다.

 

그러고보면 나는 늘 내 세계를 은밀하게 쌓아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렇게 조심스레 쌓아올린 세계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했고 인생의 시기마다 그 짝꿍들이 꼭 있었다. 그건 애인과는 다른 개념인데, 음. 오히려 애인과는 그런 것들을 전혀 나누지 못했다. 서로의 생각과 느낌들을 나누면서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관계랄까. 나의 경우에는 그 짝꿍들이 다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둘 중에 하나가 연애를 하면 이상하게 슬며시 증발해버리곤 했으니, 그것도 어쩌면 사랑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통은 새로생긴 여자친구가 나를 싫어하지. 나 같아도 그랬겠지만.) 아 물론 그렇게 생각과 느낌을 나누면서 애인 관계로 발전해버린 경우도 있지만, '발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평범한 애인 관계로 전락해서 때로는 서로를 온통 할퀴어놓고는 증발해버리곤 했다.

 

그래서 남자랑 (정서적) 짝꿍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늘 씁쓸한 마음뿐이었는지도. 시간을 내어 그 애를 위로하고 보다듬고 마음을 어루만져도 그 애는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 씁쓸하고 쓸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그런 마음이 드는 내 자신에게도 씁쓸하고 쓸쓸해져버리니까 '나 너 좋아하냐' 라는 마음을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아서.

 

그러고보면 1년전 이맘때 시작했던 관계도 처음에는 정서의 나눔이었다. 미술관에 쓰인 이해되지 않는 글들에 대해 그 애가 읽어주었고, 이 사회에 요구하는 '남자다움'에 대한 토론을 나눴으며, 여기서 네 손을 처음 잡았다며 나도 기억 못하는 손잡은 때와 장소를 말해주었을 때 온 마음이 반짝거렸던 것 같다. 수화기 너머 들려준 기타 선율은 헤어진 뒤에도 한동안 오래오래 들을 정도로 좋아했었고.

 

에라이. 여기까지 쓰고보니 당연히 정서를 나누는게 사랑이지 라는 생각이 든다. 뭔 정서는 딴 놈이랑 나누고, 애인은 또 따로 있고 그런 이상한 관계를 유지해온 비결이 뭐냐고 내 스스로에게 묻고싶네.

 

정서 (情緖) [명사]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그러니까 사랑할 때 다 못던지는거야. 내 애인말고 기댈대가 있었으니까. 나를 잘 아는 남자 선배가 나에게 '넌 사랑할 때 꼭 남자처럼 한다' 면서, 남자처럼 마음에 방이 여러 개라고 일러준 기억이 있다. 숙박업을 한다며 받아쳤지만, 정말로 돌아보니 사실 내가 그랬네. 왜 흔히들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방에 많이 비유하지 않는가. 남자는 마음에 방이 여러개고 그 방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자는 방이 하나인데 사랑할 땐 힘껏 사랑하지만 헤어지고 나선 방에서 쫓아내버린다고.

 

나는 동시에 두 사람 사랑하는게 가능한가보다. 같이 마주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쪼개쓰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내가 느꼈던 기분과 감정에 대해서 샅샅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하드웨어 따로, 소프트웨어 따로.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정말로 관계에 있어서 정서적인 소통의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만 숨을 쉬는 사람인데 나의 애인들은 대체로 (마음이) 어렸다. 물론 나도 어렸지만, 어렸기 때문에 더더욱 내 기분과 감정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를 갈구했던 것 같다. '이런 기분 어떤건지 알아? 이런 감정 너도 느껴봤어? 맞아맞아.' 나의 애인들은 어려서 혹은, 무뎌서 나의 기분과 감정을 몰라주거나 너무 바빴다.

 

나의 시간과 공간과 기분과 감정을 다 같이 쪼개쓰고 싶은 한 사람.

 

주변에서는 나를 더러 '까다로워요' 라고 말을 하지만,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면 늘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나에게 '사귀자'라고 말했던 못된 놈이 하나있었는데, 걔가 어쩌면 남자버전의 나였지 싶다. 나는 행동하지 않았고 걔는 행동했다는 것의 차이겠지. 문득 '정신적 외도'라는 말이 떠올라서 검색을 해보니 걸린다. 으악. '정신적 동반자'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758억을 위자료로 지급한 사람도 있다네.

 

이해받고 싶어요. 쀼잉. 

 

 

 

(*) '뭐야, 이 새끼는'의 주인공씨와 친구가 되고 싶지만, 정서를 나누다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미리 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