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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5월 10일 : 창문까지 닫아걸고 끅끅 울었다

 

△ 언제부터인지, 왜인지도 모르겠지만 늘 나를 꾸준히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고마운 선배님.

 

 

열 아홉살에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싸이월드에 찌끄린 글줄을 보고 국문학과에 다니는 한 선배님이 '너는 글을 계속 써보거라.' 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같은 과도 아닌 국문학도 선배의 눈에도 단박에 들 정도로 훌륭한 글줄을 내리 휘갈기는 열아홉...이면 오죽 좋았겠지만, 참 유치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는 글들.

 

그래도 이십대의 꽤 대부분, 나의 세계에는 사진과 글이 전부였던 것 같다. 늘 하고 있던게 그거였다. 사진과 글이라면 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의 세계에는 그저 작은 방 구석에 처박혀서 새벽까지 모니터 불빛에 의지해 낄낄대면서 사진과 글을 싸이월드에 올리고 댓글에 댓글을 달며 웃겨 죽는 그런 애가 있었고, 그게 다였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일' 이라고 어느 작가가 그랬다. 나는 이미 누군가의 눈 앞에 떡하니 존재하는데, 존재를 다시 증명하려니 죽을 노릇. "나님은 여기 이렇게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너님앞에 서있는 내가 바로 나님임!" 민증이라도 까드려요?

 

 

△ '존재증명'은 당최 어떻게 하는거냐. 

 

 

'산다는 건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일' 이라는 말에 의하면, 결국 사람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잖아. 삶 자체가 증명 과정이라는 거잖아. 나는 왜 존재하는거냐. 나는 무엇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는거냐. 어떤 증거를 들어서 내가 나임이 틀림없다고 밝힐 수 있을 것이냐. 내가 정말 나 인것이냐? 나를 증명하는 일. 살아가는 이유.

 

 

*

 

 

"언니, 작가해요. 내 주변에 작가 한 명도 없거든요. 멋있을 것 같아요."

"니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니까 이 참에 그쪽으로 한 번 나가보든지."

"반작가님, 항상 응원합니다."

"반, 나는 있잖아. 니가 회사 같은거 다니지 말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니면 좋겠다. 이런 까페나 하면서. 그럼 내가 도장은 열개 꽝꽝 열심히 모을게."

"니가 책쓰면 열권은 살게. 아니 열 다섯권?"

 

 

*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언니, 작가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작가를 어떻게 하는게 아니고, 니가 뭐를 쓰고 있어야 작가인거지!"

 

아.

 

 

*

 

 

뭐라도 늘 쓰고 있었으니까.

뭐라도 건질게 있지 않을까?

몇 년 만에 용기내어 다락에 올라가서 먼지쌓인 기록들을 탈탈털면서, '이렇게 좋은 글들이 가득하다니!' 한편으론 억울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로 멋진 것들을 기대하면서 몇 권을 들춰보았다.

 

 

△ 허세 근석과 싸울 수 있겠더라. 덤벼라 얍 !

 

 

무슨. 갓 이십대 특유의 발랄함과 상큼함이 곳곳에서 미처 숨길틈도 없이 툭툭 터져나올 줄 알았는데, 온통 짝사랑 얘기에 누구 오빠 얘기에 그만 좋아하네 마네... 유학가서 반장이랑은 또 언제 썸을 탔던거냐. (잘 생기긴 했었지. 그 오빠. 헤-) 반장이 안아줘서 좋았다는 얘기를 읽다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건질 것이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백수여인(크흑, 난 이제 더이상 소녀가 아니예요)이 '얍! 이제 작가가 되겠어!' 라며 뭔가를 써 내려가기에는 지금 당장은 쓸 말이 없다. 그렇다면 여태가지 써 온 것들을 추려보자.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쥐어짜내 보자. 사진 좋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고, 남들이 내게 잘한다 잘한다 했던 것들 중에 잘 쓴다는 얘기도 들어봤으니, 내가 가진 것은 그것 밖에 없겠구나. 그림도 나름대로 그릴 수 있으니, 사진이 부족하면 펜선으로 때우면 어떨까. 일단 모아서 정리해보자. 되든 안되든 한 권의 분량은 모아보자. 출판사에 있으면서 하루에도 얼만큼의 책이 쏟아지는지, 얼만큼의 원고가 뺀찌를 먹는지, 얼만큼 많은 사람들이 써대고 있는지를 알았으니, 출판사에서 안 내준다고 하면 내 돈으로라도 내보지 뭐. 나의 훌륭한 인망으로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많으니, 그들을 불러모아 '두당 열권'을 부르짖으면 백 권은 팔 수 있지 않을까 어쩔까. 절친한 북디자이너씨도 글만 쓰면 디자인은 해주마, 하고 약속은 했으니까.

 

 

*

 

 

예전의 글을 들춰보고 폴더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순간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마구 났다. 한참을 끅끅 울었다. 폴더를 겨우 하나 만들었는데 이토록 무섭고 절망적이라니. 그래도 나는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계속 가야지.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