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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5월 9일 : 골반이 저릿저릿 하네요

 

△ 드러머 내 스타일. 멋있는거봐라 진짜.

 

 

함께 아카시아꽃을 보러 가자는 아버지의 낭만적인 제안도 저버리고 '급한 일이 있다'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급하긴 급하지. 선착순 입장이라서 맨 앞자리에 앉으려면 마음이 급하지.

 

나를 표현한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월급을 털어 홍대 뮤지션들과 빵집을 먹여살리는' 일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취미. 끔찍한 여초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통 9대 1 혹은 9.5대 1의 성비를 구경할 수 있는데, 간혹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 입에 겨자를 털어넣으며 눈물바람으로 끌려나온 남성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 남성들은 공연장에서 마주치는 같은 종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눈인사를 전하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오빠♡'라고 목놓아 부르는 처참한 광경을 눈뜨고 구경한다.

 

기타치는 남자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종종 남자친구들과 공연장에 갔다가 싸움으로 번진적이 더러 있다. 공연에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남자친구에게 따끔하게 허벅지를 꼬집혔으며, ("야, 정신차려라."라는 서슬퍼런 속삭임과 함께) '나에겐 한번도 그런 눈빛을 보여준 적이 없다!'며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한 누군가도 있었다. 아 그럼 니가 기타를 잘 치던가! 라는 화딱지가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오지만, 너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훨씬 깊고 진한거라며 우물쭈물 변명을 할 밖에.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집에 대충 짐을 부리고, 다시 뛰쳐나가는 길. 어지럽도다. 그러나 나는 달려야한다. 코앞에서 보고 싶다. 기타치는 길쭉한 손가락과 드럼치는 팔뚝에 도드라지는 힘줄을. 크아.

 

좁은 공연장 안에 꽉 들어찬 백여명의 여성들을 무대에서 내려다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어제 한 뮤지션이 무대에 올라서는 "이렇게 꽉 찬 관객분들을 보고 있으니... 골반이 저릿저릿하네요. 하아" 라고 허심탄회한 심경을 토로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꺄아'로 화답했는데, 나는 저 발언이 19금인가 아닌가를 고심하느라 꺄아에 동참하지 못했다.

 

아무튼 공연 내내 몇번이나 설렁탕 국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크아~ 크아~' 하는 감탄사가 기어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삐져 나온다. 드러머가 홍대 바닥에서 꽤나 잔뼈가 굵은 분이라고 하던데, 누군지는 알 수가 없지만 진짜 섹시하더라. 크아. 분명히 (가상의)남자친구를 대동했으면 싸웠겠지. 아 그럼 너도 드럼을 저렇게 섹시하게 치던가!

 

세 시간여의 음악 여행을 마치고, 잔뜩 흥분되어 집으로 가는 길. 역시나 홍대의 밤거리는 사람들로 버글버글. 문득 몹시 허기가 져서 던킨 도나쓰에 들러 몇 개 안남은 도나쓰를 베어물고 집으로 향했지만 날씨가 이리도 좋은 5월, 토요일, 봄밤, 로맨틱은, 안 성공적. 친구에게 "맥주 한 사바리 하고 싶어" "우동 땡겨" 라고 시간차 공격을 했더니 먹혔다. 낄낄.

 

 

 

"니 냉장고에 맥주나 한 캔 꺼내오라"고 했더니, 맥주 브랜드를 읊어주면서 고르라고 하는 내 친구. 차에 맥주까지 싣고 와서 집 앞에 픽업오는 좋은 내 친구. 이게 바로 우정의 맥주 셔틀.

 

"라면 먹고 갈래요는 무신 라면을 먹고 가. 펄펄 끼리가 라면 국물을 띡 퍼밧불라." 나도 나름 토종 사투리언인데, 내 친구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왜 이렇게 구수하고 언뜻 무섭기까지 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무섭고 좋은 친구와 심야에 맥주 한 캔 하고, 우동도 한 사바리 하고 한강에서 새벽 2시까지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