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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2월 27일 : 검열하지 않는 삶

 

△ 책장을 덮으면서 그만 눈물이 찔끔!

 

 

자발적(?) 백수 생활이 내일이면 딱 3개월째에 접어든다. 3개월동안 돈을 벌지 않았단 말이야? 오호. 호기롭게 지른 작은 여행들로 통장의 잔고도 이제는 빤해져서, 이제는 정말로 온 몸을 일으켜 두 팔을 걷어 붙이고 생산활동에 나서야 할 때! (게다가 나는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의 월세 세입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내 몸의 절반은 아직까지 여행의 기쁜 유흥이 가시지 않은 채고, 또 나머지 절반은 여행 후의 게으름을 한껏 즐기고 있는 상태. 요 두 상태가 한 몸에 믹스되어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은? 따끈한 방바닥에 배깔고 엎드려서 여행책 보며 군침 삼키기.

 

나는 계획표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해야할 일이 있으면 무서운 집녑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해낸다. 그러나 한번만 비틀어보면 해야할 일이 없으면 그냥 무아지경이 되는 사람이 또 나다. 이미 3개월째 임시 휴무중이니 이쯤하면 '장기 휴무'로 간판을 바꿔달아도 어색하지 않은 시점. 일을 할 때는 알람 없이도 여섯시에 번쩍번쩍 눈을 잘도 뜨더니, 이 몸이 이제는 장기 휴무전에 익숙해지려 한다. (벌써 익숙해졌니?)

 

머리 한 번 감기가 한 나절이고, 오늘은 집 밖을 나서보리라 계획하고 겨우겨우 몸과 마음을 어르고 달래 방문 밖을 나서 시계를 보면 오후 세네시가 훌쩍 넘어있다. 이런 나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요즘은 무조건 하루에 한 번은 나를 밖에다 세워야지! 벼르고 있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오랜만에 찾은 게으름에 대한 지독한 자기 검열' 아니던가! 게으를 때는 그냥 하염없이 게을러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방 안에 하루종일 있으면서도 '눕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참, 나도 참.

 

마치 자식의 성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너 놀고 싶을 때 실컷 뛰어놀아.' 라고 다정하게 웃으며, 때맞춰 과일도 깎아내주곤 하던 엄마가 돌연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눈을 치켜뜨며 유심히 성적표를 살피는 꼴이랄까. 자식된 입장에서 얼마나 야속하겠는가 말이다. '그래, 그동안 일 하느라 너무 고생많았다. 좀 쉬어도 돼.' 라고 갖은 생색은 다 내고는, 슬며시 본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니. '어이, 최선을 다해서 쉬고 있어?' '어이, 지금 이 순간 편하고 행복해?' '어이, 그렇지만 너무 게을러져서는 안되는거야. 최소한 집에서는 자주 눕지 말라고.' '어이, 그렇게 먹고 살은 언제 뺄꺼야?'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한 출판 전시회에 가려다가 포기했다. 그리고 어제 산 책의 2권을 집어들었다. 하루종일 읽었다. 몸에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도 드디어 활자가 비집고 들어올 여유가 생기는구나. 그저께 도서관에서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를 빌렸는데 그날 꼬박 새벽까지 다 읽고는 벅찬 감동을 어쩌지 못하다가 1권과 2권을 바로 구매했다. 환갑 먹은 어머니가 서른 살 아들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는데, 묘하게 여행지와 어울리지 않는-그러니까 정말 대한민국의 평범한 할줌마(할머니+아줌마) - 분위기의 아줌마가 세계 곳곳의 명소에서 서툴고 달뜬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거참. 고령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책 곳곳에 눈시울을 시큰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천편일률적인 여행책에 지쳐서 몇 년간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게 남의 여행기인데 이 책은 정말 잘 샀다 싶을 만큼 좋은 책이다. 

 

2권의 말미에 '언젠가는 남미를 여행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램이 적혀져 있는데, 또 하나의 염원을 품은 채로 마치게 된 여행이라면 독자인 나도 못내 아쉬웠겠으나, 이미 저자의 블로그에서 어머니와 함께 빙하를 디디며 신나게 여행하고 있는 사진들을 훔쳐봤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또 어머니와 으쌰으쌰해서 남미로 떠났는지, 그 시작이 몹시 궁금했기 때문에 저자가 여행 떠나기 전 남긴 글을 통해 작은 궁금증도 해소했다. 

 

http://blog.naver.com/sneedle/220087622606

 

여기가 저자 태원준 씨의 블로그이고, 어떻게 또다시 어머니와 배낭을 꾸리게 됐는지가 적혀있다. 아으. 평소 같으면 출근해서 퇴근할 하루의 몫을, 한 권의 책을 오롯이 읽는데 썼구나. 아차. 이제 검열은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