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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두운 의자 안에서

<너의 이름은> _ 당신으로부터 내게로

어제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은 뭐지!!!" 라고 떠들고 다니다가 금지령을 먹었다.

어제는 일본의 근본 바탕에 깔려있는 수호신 개념과, '운명적 연인 = 내 목숨을 구해주는 수호신' 이라는 메타포를 떠올렸는데, 오늘 아침 좀 더 생각해보다가 재미있는 결론을 얻었다.

재미있게 본 일본 애니 중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작품 세 편을 들어보자. <시간을 달리는 소녀><괴물의 아이><너의 이름은>.

세 편 모두 주인공이 타임 리프를 한다. 그리고 결정적 인연을 만나고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흔히 만나야 할 둘 사이의 인연을 '끈'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너의 이름은>에서 할머니가 직접적으로 '무스비'라는 말을 들어 이야기 해 준다. (여담으로 무스비 의 패러디가 현재 대유행 중. 가스비, 텔레토비, 범블비, 개츠비. . 비 비 비 자로 끝나는 말은.)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더욱 모여 형태를 만들며 뒤틀리고 얽히고
때로는 돌아오고 멈춰서며 또 이어지지

그게 바로 무스비
그게 바로 시간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 남녀를 이어주는 운명도 남자의 팔목에 감겨있던 여자의 머리끈으로 표현되며, <괴물의 아이>에서 쇼타를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여자아이가 평소에 손목에 하고 다니던 실팔찌이다. (자, 나도 끈 사러 가야하나.)

세 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은 그 운명이 나의 수호신이지만, 결국 마지막 행동은 내가 한다는 것. 일본의 드라마 사정을 모르니 며칠전 고향집 내려갔다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볼 수 밖에 없었던 몇 편의 한국 드라마를 이야기 해볼까한다.

여자 집이 어렵다. 여자가 수산시장에서 험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채 10초도 안 했는데, 남자 주인공이 어떻게 알고 득달같이 쫓아와 불같이 화를 낸다. 남자 주인공은 그 길로 저축을 다 빼 여자에게 가게를 차려준다. 물론 여기서 끝나면 한국 드라마는 시청률이 안 나온다. 남자의 엄마가 그 사실을 또 어떻게 알고, 여자 가게로 가서 깽판을 치는데 남자가 또 득달같이 쫓아와 엄마를 끌어내며 여자를 안쓰러워 한다. (이 남자의 일과는 여자와 엄마를 쫓아다는게 전부인가?)

또 다른 드라마. 여자 집이 역시 어렵다. 부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남자 엄마가 여자에게 쫓아와 헤어지라고 말한다. 여자는 '너무 착해서' 그 말을 따른다. 남자는 마음 아파하고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본 엄마가 다시 '너희 사귀어라' 한다. 여자는 기뻐하며 그 말을 따른다. 기르던 개가 아파하니 장난감을 뺏었다 다시 돌려준 것 뿐.

채널 선택권이 없어서 몇 편의 드라마를 강제로 봐야 했는데, 배우만 달랐지 똑같은 이야기를 하염없이 되풀이하고 있어서 진정으로 머리가 아팠다. '여자'는 그 속에서 무얼하는가. 예쁘다. 그게 다다. 잘 때도 속눈썹 다 붙이고 화장된 상태로 잔다. 가난하다는데 피부 관리는 엄청 하는지 광이 번쩍번쩍난다. 그냥 예쁘면 주 시청자인 아줌마, 할매들 눈 밖에 나니까 캐릭터 상 '독립적인', '억척스런' 성격을 심어준다. 수산시장에서 알바를 하네, 양복점에서 일을 하네... 아줌마, 할매들 시선에서 '쟤도 열심히 사는데, 아무리 해도 지가 지 삶을 구할 깜냥이 안되'는거다. 그럼 불쌍해진다. 불쌍하면 표를 준다. 마침 왕자가 나타난다. 그냥 받으면 안되니까 여자는 받을 수 없다고 손사레를 친다. 여기서 아줌마, 할매들은 박수를 치면서 좋아한다. '예쁜데 성격까지 좋다'라고.

'지가 지 삶을 구할 깜냥이 안되'는 사람은 없다. 저 여자들은 운좋게 예뻤고, 운좋게 왕자를 만났다. 그게 다다. 아무 것도 안 했다. 아, 받기 전 사양한 것. 그래서 현실에서 여자들이 예뻐지려고 눈코입을 찢고 세우고 돌려 깎는거 아닌가. 왕자를 만나야 되니까.

자기 삶은 자기가 구한다. 자기 사랑은 자기가 찾는다. 그런면에서, 물론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저런 왕자들이 과연 좋은 연인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마지막 몫은 나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세 편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좋은 연인이다. 내가 무엇을 '해 볼 수 있게' 힘과 의지를 심어줬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소년의 목숨을 구한건 여자아이였고, <괴물의 아이>에서도 마지막에 고래 괴물을 물리친 것은 검을 쥔 쇼타였고, <너의 이름은>에서도 마지막에 마을을 구한건 아빠를 어떻게든 설득한 여자아이다. 나의 연인이 내게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선물해 준 것이다. 그런 연인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수호신' 아니겠는가.

고기를 잡아주는 연인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법을 알려준 연인. 고기를 잡아주는 연인과 사귀면 당장에 좋다. 그런데 그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고기를 잡아주지 않으면 나는 당장에 굶어죽는다. 그리고 내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없으면 안되는' 사랑과 '있어서 힘이 되는' 사랑 중에 어떤 사랑을 택하고 싶은가. 선택은 본인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