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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퀼트, 으흠

나는 어릴적부터 유난히 '여자 일'을 못한다. 누가 시킬라치면 못한다고 아주 유난을 떨며 지랄을 한다. 초등학교 2학년때 사과깎기 빵점, 중학교 가정시간에 계란 지단 부치기 F, 역시 중학교 가정시간 바느질하기 F. 그 밖에 치러졌던 '내안에 깃든 여성성 테스트'는 그 내용을 조목조목 기억하진 못해도 하나는 자부한다. 반에서 최하위였다. 아 방금 또하나 생각났는데 고등학교 1학년때 교련. 붕대감기. 죽어라 싫어했다. 너무 못해서 발로 차인듯. 지금은 교련 이라는 과목이 없어진걸로 안다. 아무튼 무자비하고 난폭하기로 유명했던 학교 실 권력의 1인자가 교련 선생님-믿을 수 없지만 여자였음-이었는데, 외모와는 달리 '누가 붕대를 아름답고 재빠르게 감아내는가'를 수시로 테스트 했다. (솔직히 전쟁났는데 어느새에 붕대를 그렇게 이쁘게 감고 있나.) 호루라기를 내 귀에 대고 고막이 아주 찢어져라 불어댔을뿐 아니라, 반에서 최고로 못했기 때문에 수시로 얻어터졌는데 나는 그 혹독한 고문을 죄다 이겨내고 여전히 반에서 최하위였다. 그 뿐아니라, 두 세반이 함께 모여 수업하는 날에도 최하위였다. 만세. 

그래서 뜨개질이나 바느질, 종이접기로 만들어낸 무언가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예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 내안의 무언가가 그런것들을 어여삐하면 안된다고 종용한다. 초등학교때나 중학교때는 잘해보려 했는데 잘 안되서F를 맞았는데, 고등학교 올라가면서부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F를 주세요 한다. 남몰래 연습해봐도 안되더라. 교련 과목을 배우는 1, 2년 내내 압박붕대는 나의 성적뿐 아니라 나의 정신까지 압박하는데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에와서야 왜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나는 내 안의 여성성을 들키기 싫었던게 아닐까 한다. 뭔가 섬세하고 자질구레한 일, 그러면서도 반복노동이 필요한 일들. '여자가 해야하는 일은 뭔가 하찮아' 하는게 알수없는 이유로 내안에 깊숙히 뿌리박은 하나의 성 관념이었다. 사실 알수없는 이유가 아니잖나. 태어나면서부터 여자아이에게는 부모뿐 아니라 또래집단, 사회가 꾸준하게 이런 관념을 심어준다. 여자는 약해, 여자는 고분고분해야해, 여자는 어때야해, 여자는 어떠어떠해야해...하고. F를 받으면서 슬그머니 좋아했던건 아닌지? 오예, 나는 요리를 못해. 나는 바느질을 못해. 나는 과일을 못깎아. 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꼼꼼하지 못해. 좋아좋아. 

내 안의 여성성을 들키기 싫다면? 당연히 남성성을 드러내고 싶겠지. 역시 무뚝뚝하고 엄했던 기술산업 남 선생님. 제도시간에 초시게를 봐가며 초마다 몇점씩 깎았다. 교련과목과 다를바 없었는데도 나는 은근히 손에 땀나는 그 긴장감을 즐겼고 제도는 전교에서 제일 잘했다. 희한하지? 손에 바늘을 쥐느냐 제도연필을 쥐느냐의 차이인데도, 뭔가 남자답고 날렵한 도구를 쥐게 된것 자체가 신났던 모양이다. 100m 달리기는 우리반 1등이었고, 체육실기는 거의 다 A. 여자애들이 하는 농구가 별것 있겠냐만은 농구도 좋아했고, 배구대회도 나가고. 단순히 운동신경의 차이보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한다. 나는 남자다운 것들을 잘해야 했고, 또 좋아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무용도 빵점이었나.

아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과일을 매우 반듯하게 잘 깎는다. 친척들이 어쩜 그렇게 이쁘게 깎니 할 정도로. 언젠가부터 요리책을 슬금슬금 사모으고 있고, 예쁜 그릇이나 수저따위에 욕심이 난다. 희한하게도 내 평생 할일없다 싶은 뜨개질 책을 작년 겨울에 한권 구입할뻔했으며-품절되서 못샀다- 요즘은 퀼트책을 가재미 눈으로 보고있다. 여성성은 아름답고 귀한것이라는걸, 약함을 상징하는게 아니라는걸 나도 모르게 알게 되면서 부터일까. 내 진정 온몸과 정신으로 거부하던 바늘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잡게될 날이 머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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