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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다정하고 오만한 작가정신

'내 이야기를 하려하지말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라' 다들 수도 없이 들어본 말일겁니다. 경청의 중요성과 자세에 대해 언급한 책들이 줄을 이어 쏟아져나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통감하는걸 보면 '중요하긴 중요한데 아무리 해도 잘 안되는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명품은 오만하지 않습니다. 왠걸? 하시는 분들이 있을테지만 명품에 부여한 가치는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낸것이지 명품 그 자체가 오만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으레 명품이 잘 팔리고 각광받는 이유는 '물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명품이 잘 팔리는 이유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잘 팔린다는 것이지요.

자박자박 눈 내리는 새벽. 잠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책을 사면 제일 먼저 표지를 들춰 이 책이 몇 쇄인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더없이 훌륭하고 좋은 내용임에도 불과 1쇄에 그친 책들도 많고, 그다지 유별날것 같지않은데도 22쇄,30쇄를 훌쩍 뛰어넘는 책들도 많더군요. 그렇다면 많이 팔린 책의 비결은 '사람들이 듣고싶어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겠지요. 

이야기를 하는 사람-작가,화가,음악가뿐 아니라 나와 당신-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기서 어마어마한 마찰이 생기네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원하고, 당신들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네가 해주기'를 원합니다. 말장난 같이 여겨지지만 이것은 엄청난 진실을 담고 있답니다. 

계속 책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사람들이 '듣고싶어 하는 이야기'라면 최고로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수히 많은 책들이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걸로 미루어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은 원치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되면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써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기때문에 여느 작가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을 골라 쓰기도 하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겨두고 남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풀어내는 이야기꾼은 역시 행복하지는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어느선까지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비위를 맞춘다 는 것을 나쁘게만 여기지는 말아주시고, 다만 더 적당한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양해해주시길.)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흐음. 저는 지금은 작고하신 김점선 화백의 글을 그림보다 더 좋아하는데, 아무튼 그 양반은 철저하게 고상한 자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는 분이라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한 대표적인 작가의 유형입니다. 그림이 안팔려서 풀뜯어먹고, 돈빌리러다니며 생활할때도 있었다하는데 '내 그림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늬들은 이해못해!' 라는 오만하게 들리기까지하는 정신으로 작품활동을 계속 해나간것입니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10년하다보니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계속 '듣고싶어'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작가정신.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데에 그 작가는 10년이 걸린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욕구와 대중의 욕구를 일치시키는데 꼬박 10년, 20년 걸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이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첫 한권을 내자마자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와서 그 울림이 크고 깊게 퍼지는 작품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듣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품을 만나자 마자 금새 깨닫게 됩니다. 아 맞아! 내가 찾던게 바로 이런거였어! 하고 말이예요. 이들 역시 위대한 이야기 꾼입니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숨겨진 욕구를 흔들어 일깨워주니 말입니다. 없는듯 있는것을 꼭 붙잡아 끌어내는 능력. 이것 역시 엄청나고 독보적인 재능입니다. 

결국 위대한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듣고싶어할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며, 또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지, 그들 안에 숨겨진 어떤 욕망이 표출되길 바라는지 '너머를 바라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너머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단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잘 듣고 들어야, 귀기울여 들어야 너머를 향한 문이 열리고 너머를 보고, 또 그 너머를 볼수 있을테니까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이야기꾼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당신네들이 다정하고도 오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주실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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