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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두운 의자 안에서

존 힐코트의 <더 로드>_ 오히려 이게 더 인간적이지 않아?

로드Lord 아라곤이 로드Road로 돌아왔다. '왕의 귀환'이라!

영화티켓을 끊는데 매표원이 아는얼굴이다. '<더 로드>이거 재밌나?' '그냥. 잔~잔~하다 카드라' 아! 경상도 사투리를 글로 옮기지 못해서 이처럼 통탄스러운때도 없었다. 아무튼 결론만 얘기하자면, 보는 내내 심장이 째지는줄 알았다.

영화평(?)을 쓰려면 늘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대중예술이다보니 호불호가 지극히 갈리고, 또 대중들 가운데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도 상당하기 때문. 괜히 어줍잖게 '어머나. 이 영화 슈레기네요'라 한마디 했다가 전문가님하들의 돌을 맞을까, 나의 해박한 무식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영화에 대해서는 별말을 꺼내지 않아왔다. 그렇지만 좋다는 놈 있으면 싫은 놈도 있는거고, 여기다 이 의미 부여하는 사람도 있는거고 저 의미 부여하는 사람도 있는거고 그게 예술의 매력 아닌가. 어느 예술가가 그랬다. '작품은 보는 사람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라고. 오예! 나도 오랜만에 <더 로드>를 최종적으로 완성해보자. 내 돈내고 내 티켓 샀으니까 내 몫의 완성은 나의 권리다.

집에 돌아와 훈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더 로드>를 검색해봤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욕을 퍼부어놨더라.
'마케팅의 승리'라는 비난이 압도적이었고, 그 밖에 뭐 다양한 의견들은 각자 찾아보시길! 아무튼 '마케팅의 승리'라는 말에 촉수가 곤두선다. 마케팅이 뭐 어쨌길래? 나는 아무 정보없이 그저 예고편에서 아라곤의 얼굴을 영접하고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에 달려간 아낙인지라 순수한 empty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소설을 영화화했다는게 알고있는 정보의 전부. 아무튼 궁금한 마음에 어떻게 홍보를 했나싶어 뒤적거려 보았더니...
오 마이갓. 이게 어떻게 '모험'이고 '스릴러'가 될 수 있는가. 게다가 줄거리는 더 가관이다. '상상 그 이상의 충격!'
아주 단편단편적인, 영화의 조각조각들만 따로 모아서 새로운 스토리를 써놨구나. 물론 영화홍보라는것이, 사람들이 흥미로워 할만한 씬들을 짜깁기해서 보여주는게 맞지만 이건 아니잖아? 정말 줄거리만 보고 뭔가를 기대하며 간 사람들은 극히 실망할수 밖에 없는 정보다.

<더 로드>는 모험도 아니고, 스릴러는 더더욱 아니다. 굳이 장르를 정하자면 뭐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담백하게 말하자면, 영화배경은 지구종말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지구종말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매력적인 소재였지만, 이렇게 영상관련기술이 발달하면서 디테일하게 눈앞에서 그려대기 시작하니 두려워진다. 하긴, 영화감독하면서 지구종말 한번 찍어보고싶지 않을 감독이 어디있으랴만 너도나도 찍어대니 무서워. 엉엉. 나중에 지구종말이 오면 좋아하는 스토리중에 하나 택할수 있을까?) 지구종말을 그린 영화는 많이 있었지만, 비교적 최근영화와 내가 본 영화의 교집합을 추려보면 <눈먼 자들의 도시> <2012> 정도. <코어>는 국내에서 흥행은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 그 무뚝뚝한 지구과학 여선생님이 보라고 보라고 극찬을 했던 영화인데 아쉽게도 학업에 매진하느라 영화볼 시간이 없었...(푸훗!)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 혹시나 내 블로그에 닿게된다면 아래부분부터는 영화를 보고나서 읽으시길.)

<눈먼자들의 도시>는 보면서 좀 불편했다. 좀 오랜시간이 지난지라 기억이 불분명하지는 않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은 안했다.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에 지나치게 앵글을 맞춘 나머지 오히려 본래 의도를 망쳐버렸다는 생각. 교양과 예의의 겉치레를 벗어버린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식욕, 그리고 성욕뿐. (인간 저면에 도사린 '욕망'이라는 것들이 응달에서 양달로 나왔을때-어쩌면 그 욕망들은 여전히 응달에 머물러 있다. 모두에게 드러내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므로 여전히 혼자만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혼자 '볼수있는' 여자 주인공이, 다른 인간들의 웅크린 욕망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겪게되는 정신적, 심리적 패닉상태를, 드러나지 않은 시선의 관객들도 함께 '목격'하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남의 것을 보게 된 야릇한 불편함과, 나도 들키고 있을지 모른다 하는 불안감이 뒤범벅된.) 아무튼 <눈먼자들의 도시>는 내가 기대했던 괄호안의 이런것들을 채워주진 못했고, 그저 자극적인 장면들만 미친듯이 찍어대서 보여주려 하다보니 '내가 느끼고 싶었던' 불편 보다는, '참 좋은 소재였는데. 아깝다'라는 애석함을 내게 선사했다.  

<눈먼자들의 도시>가 인간저면의 욕망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2012>는 너무 고매했다. ('헐리우드 돈지랄'이라고 썼다가 잠시 망설임. 풍부한 영화예산이라고 하자.) 아무튼 영화예산에 관한 부분은 제껴두더라도,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보다 일행들을 먼저 구하려는 아름다운 '동지애', 결국에는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에게 배를 열어 그들을 구하는 눈물나는 '선행'. 헐리우드 영화에서 빠질수 없는 '하나뿐인 우리의 영웅'과 숨막히는 타이밍, 간발의 차이. 쩝. 약소국의 국민으로써 가지는 위화의식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결국 메세지는 '미국이 세계를 구한다. 낙원으로 인도한다' 로 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지구에 닥친 종말, 인류의 유일한 구원책 방주, 영웅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 그냥 장면만 지구종말이었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고 해두자. 어쨌든 사람들은 이런영화를 좋아한다. '역시 인간은 위대해!'

<더 로드>에서도, 극한 상황에서의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食人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힘센자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강간한다. 약한자들은 마트의 통조림처럼 창고에 켜켜이 쌓여져 '뚜껑따일' 날만을 기다리며 벌거벗겨져 덜덜 떨고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은 사이드다. 옆으로 비켜나있다는 말이다. 영화 앵글은,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욕망과 '아버지'라는 이름, 이 두가지를 한번에 짊어진 남자를 그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두가지를 한번에 짊어지기가 점점 버겁다. 벌거벗은 욕망과 마주하지 않으려 발버둥쳐보는데 잘 안된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몰고가니까. (영화에서는 '죽고싶은'욕망에 초점을 맞췄다. '살고싶은' 욕망에 의해 모두를 죽이는 이들과 함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죽고싶은' 욕망을 겨우 잠재울수있는 '살고싶은' 욕망이므로. 그런데 또 '살고싶은' 욕망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한다.) 그래서 아들앞에서 '나는 착한 아버지이지만' 사람을 죽이고,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 아들이마에 장전된 총구를 겨눌수 밖에 없는것이다. 아들이 묻는다. '아빠. 우리는 착한 사람이야?'

영화는 남자를 '한없는 아버지'로 그리지 않았고, '욕망에 휘둘릴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도 그리지 않았다. 그저 계속 시간과 줄타기를 해나간다. 살기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한다. 누군가가 나대신 죽어줘야 내가 밥을 한번 더 먹고, 하루를 더 산다. 그래서 노인을 쫒아내고, 도둑을 옷벗기지만 아들의 요구로 인해 노인에게 밥을 주고, 도둑에게 다시 옷을 돌려준다. 아들이 누군가? 나의 욕망에 반反해 '나를 살게하는 자'이다.

쓰다보니 좀 복잡해졌지만, 사실 이게 진짜 인간적이지 않는가? 지구종말이 왔다. 누군가는 인간을 식인괴물로 그렸고, 누군가는 인간을 초특급 울트라 슈퍼영웅으로 그렸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 그런건 없다. 하나를 보는데 있어서는 보는 사람만큼의 시각이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에 진지하게 초점을 맞춰본 훌륭한 시도였지 않은가? 진짜 힘들고 못살겠어서 죽고싶다, 그런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다. 왜? 내가 아니면 안되는, 나를 살게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아쒸 어떻하지. '가슴에 불씨를 간직하고' 되든 안되든 그냥 앞으로 가자. 

사실 이 영화 한국에서는 흥행 못할것 같다. 모험도 아니고 스릴러도 아니고. 은근한 사람들이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배고픔에 못견뎌 아들을 잡아먹는 엽기행각도 없다. (설마 기대했어?) 그렇다고 아버지가, 한때 열연했던 반지의 제왕도 아니라서 귀신들 끌고 세계를 제패하지도 못한다. 하긴, 얻을게 있어야 제패를 하지. 그냥 아들데리고 먹을꺼찾아서, 또 사람들을 피해서 타박타박 간다.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솔직히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누군가들은 혹평을 하겠지만 그럼 뭐 어때. 난 아름다운 인간이 좋다. 책에서 그러잖아.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온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