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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_일주일에 세 번, 하루30분 이상

오늘 날짜로 몇 쇄를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은 책은 2009년 2월 9일 36쇄를 찍은 책입니다. <엄마를 부탁해>. 이미 많은 매체에서 굵직하게 다루어졌고, 한 유명 인터넷서점에서는 아마 '올해의 책'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한 작품이지요. 저는 사람들이 많이 읽는-소위 베스트셀러-책은 잘 읽지 않는 편입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것 같네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 하나 그른 것 없다, 베스트셀러 라는 거 읽어보면 속 빈 강정이더라. 제 나름의 이유있는 항변을 들어보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는 '무식이 탄로날까 두렵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군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보물을 발견했는데, 다들 무릎을 치면서 아하! 하는데, 혼자 멀뚱멀뚱 눈 뜬 장님될까봐 저어한게 사실이거든요. 노래방에 가서 아무도 모르는 노래를 부르는 심리와 비슷하다 할까요. 다들 아는 노래를 부를 땐 조금만 엇나가도 얼굴이 발개지지만, 아무도 모르는 노래는 좀 더 목청높여 부를 수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베스트셀러' 한 권 집어들었습니다.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데 선뜻 손이 가지않는 책이라면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 되지요. 서울 갈 일이 있어 가는 내내 읽었습니다. 아는 이를 만나 서울역 맞은편의 까페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제 손에 든 책에 눈이 갑니다.
- 이거 <엄마를 부탁해> 아냐?
- 한번 읽어보려고. 근데 뭐. 난 엄마 얘기 다룬거 별로 안 좋아해.
책을 넘겨받은 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책을 휘리릭 넘깁니다.
- 맞아. 엄마얘기는 너무 빤해. 엄마가 어찌어찌 하다가 병에 걸렸다, 죽었다. 그제서야 가족들이 엄마의 존재를 깨닫는다. 별로.
나도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끄덕끄덕. 맞아. 엄마얘기는 별로야. 너무 빤해. 끄덕끄덕.

이 작품, 시점이 참 재밌습니다. 전지적 작가시점인데, 전지적 시점치고는 너무나 다정합니다. '전지'라는 말이 全知, 즉 '모든 것을 다 안다. 속내 일일이 다 꿰뜷어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성당의 기도문도 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로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시선, 그래서 두려운 시선.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그런데 꽤 독특한 화자의 시선덕분에,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말투덕분에 자전소설보다도 훨씬 더 가깝게, 심지어 살갑게 느껴지더군요. 맨 첫 장을 읽자마자 이런 생각이 단박에 들었습니다. '시점을 이렇게 풀 수도 있구나. 꽤 괜찮다. 이런 시점이라면 어떤 내용이든 히트치겠는데?' <엄마를 부탁해>가, 제목 여섯자만 읽어도 내용이 빤히 짐작되는 그렇고 그런 '엄마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히트를 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점덕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 뒤에 실리는 작품해설에 이 시선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음성이 그 문책의 시선으로 소설의 표면에 노출되지 않은 것은 단지 형식적인 소설적 장치의 문제일 수 없다. 그 호명과 문책의 시선은 엄마의 몫이되, 엄마가 그 몫을 거절함으로써 텅 비어버린 자리였던 것이다. 그 호명이 생성되는 빈자리를 두고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거나 신(神)의 시선이라 쉽게 말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전지적 작가시점. 신과 같은 위치에서 등장인물의 모든 것을 내밀하게 꿰뚫어보며, 그로 인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자각하지도 못하는' 그 시선과 자연히 거리를 두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은밀한 죄의식을 가지게 되면, '자각하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신新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전지전능한 그 존재는 우리를 벌할 수 있고, 우리는 당연히 그 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의식 없는 인간이 없는한은요. 그 시선의 존재이유는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라고 까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우리를 '벌하지 않기로' 결정내렸을 때. 아니, 그 시선의 존재자체가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닌,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만 아연해집니다. 게다가 그 존재가 다름아닌 '엄마'였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다시한번 까마득해옴을 느끼지요. 그 어떤 시선도 엄마만큼 나를 여실히 뜯어보지 못하고, 또 그 시선안에 엄마만큼 애정을 깃담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를 속여넘길지라도 엄마를 속여넘길 수는 없었고-어릴 적,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변명을 할라치면 엄마는 늘 제게 '내 눈을 쳐다보고 똑바로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감히 엄마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늘 굵은 눈물방울을 툭툭 떨어뜨리곤 했었지요- 어느 누구에게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엄마에게 용서받지못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작가는 화자의 시점을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자식들, 남편, 사랑했던 남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로 자분자분 옮기면서 엄마의 일생을 반추하고, 엄마의 부재를 통해 그들 스스로 '얼마나 엄마와 끈끈하게 엉겨있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합니다. 그로 인해, 짐짓 알면서 마주대할 용기가 없었던 '죄의식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줄곧 '사랑'임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지극히 빤하디 빤한 이 이야기에 그만 아연해지는 것입니다. 늘 곁에 있는 엄마가 신神이었음을, 전지전능한 사랑의 여신이었음을, 작가는 이 묘한 시점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합니다. 첫 장을 열었을 때 '이런 시점이라면 어떤 내용이든 히트'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의 우매함을 꼬집으며 이 시점은, 이 시선은 '엄마 얘기'가 아니면 쓸수도, 써서도 안되는 것임을 책을 덮으며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내공을 다시한번 절절히 느끼기도 했구요.)

매순간 기적 속에 살면, 그것이 기적인줄 모르고 삽니다. 매순간 기적 속에 살다보니 아무리 별나고 진귀한 것이라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작가도 작품을 통해 계속적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 집은 짐승이 잘 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 집 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강아지는 마루맡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배 여섯배 낳았다...(중략)...텃밭에 씨를 뿌리면 다 솎아먹기도 벅차게 푸른 새싹들이 아우성을 치며 올라오고...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라든가 '전화벨 소리만 듣고도 지헌이 전화인줄 아는 것' '서울역에 도착한 엄마의 보퉁이가 한갓 여인이 들고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것' '죽은 사람을 만나 같이 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눈 것' 등의 사실을 통해 엄마의 신성神性, 엄마가 매순간 기적을 행해온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속의 자식들, 남편, 시누이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우리들 역시 그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줄 모르고 덤덤하게 읽습니다. 왜냐면 늘 보아오던 우리엄마의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으니까요. 우리도, 그네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엄마는 그저 엄마인줄, 엄마면 으레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쯤으로 여겼으니까요. 작가가 엄마의 이름을 '박소녀'라 부른 것도, 모든 것을 할수있는 엄마이지만 간간이 엄마가 할 수 없는 것-닭을 못 잡는 것-이라거나, 심한 병을 여러차례 앓았던 이야기를 끼워넣은 것은, 엄마가 행하는 기적속에 눈물과 아픔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살빼고 싶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떻게하면 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있지요. 일주일에 세번, 하루 30분 이상. 그런데 실천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루30분, 티비 잠깐보고 전화잠깐하면 금방 한시간이 가는데 운동을 위해 30분을 따로 빼놓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신경숙 작가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자, 얼마나 빤한가요. 제목부터 <엄마를 부탁해>라고, 빤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진실된 해결책은 언제나 간단합니다. 엄마한테 잘하면 됩니다. 어떻게? 다들 아는 '일주일에 세번, 하루 30분이상' 어떤지요. 기억상실증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몇달내내 질질끄는 똑같은 내용의 드라마를 엄마곁에 앉아서 같이 보고, 했던 얘기를 또 하려는 엄마에게 '그 얘기 나한테 이미 했잖아' 하고 말을 막으려 들지말고 맞장구치면서 재미있게 들어드리면 됩니다. 올해 2월에 36쇄를 찍었으니, 2009년 12월 13일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까요. 그대들에게, 또 스스로에게 말해봅니다. '엄마를 부탁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