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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엄홍길의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_ 내 영혼을 비빌 자격

그의 글에는 유난히 '비비다'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또한 뒤이어 이어지는 문장의 앞머리에 '사실'이라는 부사를 눈에 띄게 즐겨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뒤에 또 '사실'을 말하는 사람. 일평생을 얼음산에 비벼온 것도 모자라 활자까지 종이에 비비는 사람.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비비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봅니다. 많은 정의들 중에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재료에 다른 재료를 넣고 섞이도록 버무리다'. 나는 한참동안 그 정의를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비비다'라는 활자를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봅니다. 비빔밥도 생각나고, 팥빙수도 생각이 납니다. 사람좋은 그의 웃음을 들여다보며 비비고 비비고 또 비빕니다.

'비비다'는 행위의 전제조건은 성질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가 하나의 품에 기꺼이 안길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태 수없이 많은 그릇의 비빔밥을 마주했으면서도 왜 이토록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던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엄홍길의 영혼은 히말라야의 설산에 안길 준비가 된 상태의 것이며, 히말라야의 산신山神들이 기껍게 안아줄만한 것입니다. 히말라야의 신들이 기쁘게 받아줄만한 영혼이라. 히말라야에 깃든 티없이 깨끗하고 영험한 영혼들과 엄홍길의 영혼은 서로 비벼질 수 있는 것, 즉 성질이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엄홍길이 가진 깨끗하고 성스러운 기운은 저로써는 아직 헤아려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대신 '차마'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네요.

활짝 웃고 있는 엄홍길의 사진은 월간 PAPER의 11호에 실린 것인데 이 사진 한장때문에 오랜만에 PAPER를 집어들었고, 사진 밑에 실린 인터뷰 중 그의 책에서 발췌된 글이 인상깊어 책까지 사보게 되었습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소설가 김훈의 글입니다.

'길이란 어디에도 없고, 가야한다는 생명의 복받침만이 있다. 인간의 앞쪽으로 뚫린 길은 없다. 길은 몸으로 밀고 나간 만큼의 길이다. 그래서 길은 인간의 뒤쪽으로만 생겨난다. 그리고 그 뒤쪽의 길조차 다시 눈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어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길은 다만 없는 길을 밀어서 열어내는 인간의 몸속에 있다. 몸만이 길인 것이다. 그래서 엄홍길은 제 몸을 밟고, 제 몸을 비벼서 나아간다. 그리고 몸을 비빌 수 없을 때, 바위와 눈과 바람이 인간의 몸을 받아주지 않을 때, 그는 울면서 돌아선다.'

엄홍길. 우리는 그를 '대장'이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