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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매일의 얌,채식

취미는 피클

 

 

 

 

 

 

 

 

 

 

미소가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피클이라 하네
만화책도 영화도 아닌 음악 감상도 아닌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피클 나눠먹으면 좋겠대
난 어떤가 물었더니 미안하지만 나눠주기 싫다고 하네

 

 

취미는 피클. 자정을 넘긴 컴컴한 1시에 또 피클을 만들었다. 이번엔 비트와 샐러리 피클. 시커먼 밤에 시뻘건 비트를 뚝뚝 썰고 있으니 비트가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해서 좀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피클을 담을때는 병에 야채를 꽉 채우는 것이 좋기 때문에, 비트를 채우고 나머지 부분은 샐러리를 꽉꽉 눌러담았다. 비트와 샐러리라니. 생각만 해도 흐뭇하군.

 

 

요즘 주말마다 피클을 담은지가 한달째다. 처음엔 가지 + 오이 피클로 시작해서 귤피클에 양상추 피클도 담고 오늘은 비트 + 샐러리. 피클이 그렇게 좋으냐는 말도 듣고 있는데, 피클이 좋다기보다는 요리를 하는 느낌이 좋아서 일주일에 한번쯤은 뭐라도 하려고 하는편. 그렇다고 거창하게 이런저런 요리를 하기에는 바쁘기도 하고 손이 많이 가기도 하는데다가, 원래 야채를 좋아하니까 피클은 쓰삭 만들어놓고 즐겨먹는다.

 

 

조용한 밤에 물을 올리고 병을 소독하고, 다시 물을 올리고 식초에 월계수 잎 몇 장을 뚝뚝 넣고 통후추도 넣고 여러가지 허브들을 넣고 설탕도 몇 스푼 넣고 다글다글 끓어오르면 시큼한 냄새가 방 전체에 확 퍼진다. 나는 곽진언을 틀어놓고 조용조용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야채들을 손질한다. 도마에 뚝뚝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느낌, 재료의 가지런하고 예쁜 빛깔, 향. 피클을 요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뭔가를 만지고 썰고 굽고 삶는 행위가 나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된다. 지난 직장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무조건 회사 전체의 식사를 담당해야 했는데, 가끔 예고없는 손님이 들이닥치면 1시간 내에 8인분씩 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바쁘게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면서 또 그런 시간시간 사이에 다른 요리들의 순서를 안배하고 뭔가를 굽고 졸이고 부쳐내는 시간. 매번 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 시간이 나의 업무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해방창구였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도 채식에 관심이 있었지만 요즘은 더 많은 관심을 두려고 한다. 아마 내가 엄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인 것도 같은데, 결혼을 하게 될지 하지 않게 될지 애를 낳을지 애를 낳지 않을지도 여전히 물음표이지만, 어쨌든 한 여성으로서 내가 엄마의 가능성을 늘 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요즘은 굳이 모른척 할 수가 없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아이의 엄마가 되어가고 그 아이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어쨌든 엄마로서 가능한 아이에게 좋은 것들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노력해야한다.

 

 

나의 어머니는 늘 내가 시력이 나쁜 것에 대해 죄스러움을 갖고 미안해했다. 나는 아주 아기 때부터 TV에 유독 가까이 붙어있었다고 했는데, 아이가 워낙 TV를 좋아해서 그런줄 알았단다. 세네살 무렵에 안과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엄마를 힐난했다고 했다. 아이를 이제 데려오면 어떡하느냐고, 이 아이는 평생 책을 봐서는 안될 정도로 심각한 시력 손상이 있는 애라고 했단다. 지금도 안경이나 렌즈를 맞추러가면 꼭 나에게 물어본다.

'혹시 사고 당하셨어요? 시력이...' '아니요. 원래 그래요.' 그런데 우습게도 평생 책을 보며 밥벌이를 해야할 운명이니 삶은 참 알 수가 없기도 하다.

 

 

나는 평생을 눈에 대한 어마어마한 컴플렉스 속에 시달렸는데 그게 자라면서 나의 가슴을 다 찢어놨다. 늘 결혼에 무관심했던 것도 아이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것도, 그런 고통을 나의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고 싶다는 나름의 방어책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요즘 생각하는 것은, 어떤 존재가 나에게 온다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것은 운명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삶의 고통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해서 삶의 기쁨마저 앗아갈 권리는 내게 없는거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노력할꺼고. 내가 생각하는 삶은 대체로 좋다. 빛과 그림자가 있어서 아름답다. 그림자의 아름다움은 그 너머에 다시 빛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데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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