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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향해 익어가는 중

 

 

 

 

, 열매의 계절이 왔다. 한 해의 햇빛과 바람을 그 안에 꼭 가두고선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예쁜 빛깔에 열매가 지나온 시간의 노고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쩌면 이렇게 제각각 예쁠까. 날 향해 동글동글 보드랍고 상냥하게 웃어주는 열매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열매와 꼭 닮은 얼굴들이 포개진다.

 

가지런한 아이들은 열매를 닮았다. 착실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수줍게 피워내는 동그란 웃음이 열매를 닮았다. 저마다의 시간과 꿈을 품고 골똘히 익어가는 모양이 열매를 닮았다. 뭣도 모르고 마냥 예쁜 그 모습이 열매를 닮았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열매가 되고 싶을까. 어떤 열매가 되는 중일까. 가만한 가능성을 품고 찰랑이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주 달콤하고 씨가 많은 열매

-장웅희(18)

 

한 입 꾹 깨물면 과즙이 줄줄. 아주 듬뿍 익은 열매는 상상만 해도 행복하지만 먹을 때마다 귀찮게 툭툭 뱉어내야하는 씨는 영 곤란한 존재. 그렇지만 열매의 입장에선 씨가 제일 중요한 보물이다. 먹는 생각만 하느라 그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의 씨앗 : 나는 꿈이 두 개예요. 천문학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해요. 천문학자는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꿈이고, 선생님은 작년부터 생긴 꿈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하늘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주에 관심이 생겨서 책도 사서 봤고, 지금은 천문부 동아리 부장을 맡고 있어요. 우주는 알면 알수록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작년에 우연히 선생님 대신 과학 수업을 진행한 거예요. 과학에 관심 있는 아이들한테 선생님이 대신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나도 한번 해봤죠. 반 친구들 반응이 아주 좋았고 나도 무척 재미를 느꼈어요. 그때 선생님이 되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의 열매 : 열매를 생각하면 달콤한 과즙이 대번에 떠올라요. 지금의 나는 고작 꽃망울만 맺은 정도랄까? 나는 아주 달콤하고 씨가 많은 열매가 될 거예요. 씨는 새로운 열매가 태어날 수 있는 근원이잖아요. 천문학자가 되거나 선생님이 되면 새로운 씨앗을 품는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누군가를 가르쳐서 나의 지식을 널리널리 퍼트리는 거죠.

 

열매의 고민 : 공부를 빡세게 해서 고3때는 좀 수월하게 공부하고 싶어요. 서울대 천문학과를 가고 싶은데 그 수준에 걸맞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이 있거든요. 그리고 내년 3,4월쯤에 열리는 천문 올림피아드를 나가고 싶어요.

 

 

귤처럼 새콤달콤한 열매

-전예담(14)

 

귤은 자기가 귤인걸 미리 알고서 열심히 컸을까. 아닐 꺼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활짝 받아들이다 돌아보니 어느덧 노랗게 빛나는 귤이 되어있었겠지.

 

나의 씨앗 : 나는 꿈이 없어요. 나는 그냥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은 다 하고 싶은 게 있고요, 언니는 국정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나만 꿈이 없어서 사실 주눅이 들기도 해요. 꿈이 없다는 게 좀 나쁜 것 같아요. 그렇지만 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열매 : 나는 아직 많이 안 익은 열매예요. 귤정도 크기. 그렇지만 다 크면 새콤달콤 맛있는 열매가 될 거예요. 어떤 열매일지는 잘 모르겠어요.

 

열매의 고민 : 올해가 시작할 때 숙제 밀리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직 못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백점 맞아보고 싶어요. 시험 아무 거나요. 친구들이 공부 잘하는게 부러워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열매

-이한호 (13)

 

열매는 되게 힘들여서 세상에 나온 거예요.” 작은 꼬마가 열매의 시간까지 헤아려서 말한다. 작은 그 속은 얼마나 깊은걸 까나. 쑥쑥 자라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도닥여주는 열매가 되어주렴.

 

나의 씨앗 : 소방관이 되고 싶어요. 열 살 때부터 결심한 거예요. 열 살 때 우연히 뉴스를 봤는데 소방관 아저씨들이 사람들 구하는 게 멋있었어요. 위험하고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할 일 이라고 생각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나의 열매 : 저는 아직 열리기 전의 열매예요.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전 보기 좋은 열매가 되고 싶어요. 사과같이 새빨간. 열매는 되게 힘들여서 세상에 나온 거예요. 열매가 되기까지 엄청 힘들었을꺼예요. 나도 열매가 된다면 힘들게 자라서 세상에 나온걸꺼예요. 힘들게 자란만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열매가 되고싶어요.

 

열매의 고민 : 시간을 잘 쓰고 싶어요. 엄마가 늘 이제 육학년이니 시간을 잘 써야한다고 말씀하세요. 지금 학원을 가야하는데 너무 더워서 가기 싫어요.

 

 

예쁘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열매

-아침(가명,20)

 

아주 실하게 여문 빛깔 고운 열매를 보면, 굳이 입에 갖다 대지 않아도 마음이 그득해진다. 열매의 마음도 행복으로 꽉 찼을 꺼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자기가 예쁘고 고마워서.

 

나의 씨앗 :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꿈이에요. 저는 사진 찍고 글 쓰는걸 좋아해요. 여행지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스냅사진 촬영을 해주는 일도 해보고 싶어요. 사실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최근이에요. 주변 친구들은 소위 스펙 쌓기에 돌입했는데 나도 불안했지만 마냥 공부가 답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사촌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지금은 생각이 좀 정리됐어요.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니까 아직은 좋아하는 일부터 최선을 다하기로요. 이번 방학동안 공부를 하지 않고, 대신 지난 1년 동안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일본을 다녀왔어요. 다녀와서 찍은 사진들을 책으로 정리해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더니 무척 기뻐했어요. 누군가가 나의 사진을 보고 감탄해주고 좋아해주는 것이 뿌듯하고 참 좋았어요.

 

나의 열매 : 제가 어릴 적에 부모님은 무조건 큰 꿈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전 이제야 꿈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막 맺히기 시작한 조그마한 열매일 거예요. 나라는 열매가 다 익으면, 누가 봐도 아 참 잘 익었다!’ 감탄하는 크고 실한 열매가 되고 싶어요.

 

나의 고민 : 일단 최대한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해볼 생각이에요. 나는 아직 여물려면 한참 더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이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손 위에 반짝, 작은 열매 한 알을 놓아본다. 한 알의 예쁜 열매가 내 손에 놓이기까지 이 녀석도 충실하게, 때로는 고단하게 숱한 날들을 지나왔을 테지. 한 입 베어 문 열매에서 햇살의 단맛이 느껴진다. 열매를 닮은 아이들의 얼굴도 그랬다. 천진한 얼굴들엔 나는 어떤 열매가 될 수 있을까요하는 불안함이 분명 엿보였지만 그 얼굴들이 참 열매다웠다. 흔들리고 덜컹거리면서 자기답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익어가는 열매들. 아이들이 품을 동그란 꿈에서도 분명히 햇살의 맛이 나겠지.

 

 

 

 

* 열매에 관해 쓰던 글을 두 번이나 엎고 급하게 인터뷰를 나가 '열매같은 아이들'을 만나겠다며 딴 인터뷰다. 시작부터 맘에 들지 않았기에 당연히 결과도 별로. 회식 자리에서 술을 먹다가 '대표님, 제 글 그지같죠' 라고 물었더니 대표님이 '그래 니꺼 좀 거지같았어.' 라는 꽉 찬 피드백을 날려주신다. 역시 내가 자신 없으면 읽는 사람들도 다 느끼니까. 그래도 보람은 만난 아이들이 참 예뻤다는 것. 정말로 열매같았다는 것. 열매의 얼굴을 하고 제들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웃고있더라는 것. 어른들이 우리 어릴적에 '아이고 화장하지마라. 너 있는 그대로가 제일 예쁘다.' 했던 그 말이 또렷 귓가에 남는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자다가도 글을 만지는 꿈을 꾸다가 무슨 좋은 표현이 떠올라 벌떡 잠을 깨고는 '아' 라며 탄식해버린 새벽도 있다. 샤워를 하다가도 '으!' 라며 머리를 벅벅 긁은 날도 있지만, 직업 중에 글쓰는 직업이 평균수명이 제일 짧다는 통계를 본 기억에 갑자기 무섬증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일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좋다. 가진게 얼마 없어도 가진 최고를 다 털어넣어야만 하는 일이니까. 분명 다른 일을 할 때의 나는 이렇지 않았거든. 거창하게 꿈이랄 것도 없지만, 꿈없는 자를 멸시하며 꿈꾸는 자를 비난하고 꿈이룬 자를 질투하는 이 기괴한 사회 속에서 그 놈의 꿈이라는 건 참 높고도 요상하게 변질되어 버린 것 같지만, 그냥 꿈이라는 건 매일의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어떤거면 되는거잖아. 매일의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 매일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매일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작은 꽃과 음악 같은 것.

 

 

오늘 새벽, 저 바다건너 사는 친구가 합격증을 보내왔다. 채 여섯시가 안되어 눈을 떴는데 핸드폰에 합격증이 담겨 있었다. 들여다보고 빙긋 웃었다. 날이 흐려 은근한 새벽이 감도는 내 방. 축하합니다, 라고 작게 중얼거려본다.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과 숱하게 넘겨봤을 페이지에 붙은 인덱스와 잊지 말고 되새겨야할 어떤 일들과 생각들.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린 꿈도 들여다보았다. 매일의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그 마음을 위해 매일을 사는 마음을 조금은 안다.

 

 

우리는 그냥 보통들. 보통의 열매들. 애쓰는 열매들.

뭔가를 향해 익어가는 중

보통 중.

 

 

그래도, 그래서 행복한 보통.

(어쩌면 그 친구는 스페셜일수도 있으니 보통은 나만 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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