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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두운 의자 안에서

<쥬라기 월드>_ 남자답게 뭐라도 좀 해봐요!

 

△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효도관광말고 효도관람. 개봉하자마자 삼디안경을 쓰고 열심히 본 <쥬라기 월드>이지만, 어머니의 보고싶다는 말에 처음보는 양 다시 보았다. 공룡이 나올때마다 입을 틀어막고 놀라는 어머니를 훔쳐보며 웃기도 했고. <쥬라기 월드>를 처음 보고 나온 여자 둘의 감상평은 '이모 남자친구(주인공) 멋지다' 였다. 그 날 나의 짤막한 기록을 찾아보니 '남자는 역시 어깨' 라고 남겨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성에 대한 온갖 판타지를 다 때려넣은 영화이지 말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으레 그러하듯이. 그러나 나는 최근 <남자를 위하여>라는 책을 독파하지 않았던가. 오늘 아침에도 벌떡 일어나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남은 몇 페이지를 들여다 보는 지식인의 면모를 발휘하였는데-곧 휘발되지 않기를!- 책을 읽고 변화가 없으면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사실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오늘은 이미 아는 스토리의 플룻을 따라가며 지루해하기보다는 영화에 녹아있는 '남자다움'에 초점을 맞춰 감상했다.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 '난 남자다' : 뭐든지 잘하는 남자

 

 

영화는 두 남자를 중심으로 흐른다. (이모의 남자친구인 오웬役과 큰 아들 잭役) 이 두 남자는 '남자다움'이라는 남성 판타지를 구현한다. 오웬은 이미 완성된 이상적인 남자이고, 잭은 오디세우스적 모험을 통해 소년에서 남자로 나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웬부터 보자. 모든 남성 판타지를 구현한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멋있다' 였지만, 오늘은 도대체 그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곰곰 헤아려보았다. '진짜 남자라면 으레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감독의 시선이 녹아있다. 물론 감독도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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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라면 식인공룡 네마리쯤은 키워줘야.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1. 리더십 : 그는 그 사납다는 공룡을 제압한다. 네 마리씩이나. 그 공룡들은 사람을 막 물어뜯고 잡아먹지만 오웬 앞에서는 얌전하다. 그는 공룡 사회 내에서 서열 1위를 구축했다. 

2. 소통 : 그는 '제압'이 아닌 '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워도 쎈데 부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열린 리더다. 공룡 네 마리뿐 아니라 모든 공룡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고충을 헤아린다.

3. 실력 : 그의 본 업무는 '공룡 조련'이다. 그런데도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의 안전이 걱정되어 대표는 그를 적임자로 부른다. 공룡조련가보고 건축물의 오류를 발견해보라는 말인데, 논리는 놀랍게도 '해병대를 다녀온 친구' 라는...

4.지능 : 건축물에 오자마자,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공룡의 사회성이라던가 유대감에 대해서 줄줄 나열한다. 물론 공룡 조련사니까 여기까지는 가능하다고 치자.  

5. 목숨을 내놓는 살신성인의 자세 : 실수로 공룡에게 잡아먹힐 뻔한 조련사를 구하고, 대신 뛰어든다. 남자라면 이정도야. 훗!

6..스피드 : 속편이 줄줄이 나오려면 주인공이 죽으면 안되지만, 어찌됐든 잘 뛰고 볼일이다.

7. 추리력 : 하도 이것저것 다 잘하니까 나중에는 여주인공이 '냄새나 발자국으로 추적을 해달라'고 한다. 그는 '나는 인디언 추장이 아니오' 라며 겸손을 떨지만.

8. 섹시 : 어디에서 또 오토바이를 구해와서 타는데, 기가막히게 섹시하다. 오죽하면 훈내 진동하는 그 뒷태를 보고 남자애들이 '베데쓰!badass' 라며 소리칠까.

9. 상황대처력 : 대표나 상황조정실의 수장보다 기가 막히게 모든 판을 다 꿰뚫고 있는 전략가. 지금 당장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의 말을 듣지 않아서 난리가 난다.

10. 큰 통 : 나는 현실남자들이랑 많이 싸워봐서 그들의 째째함을 여러번 목격했다. (남성이 유별나게 째째하다는 폄하의 뜻이 아니라, 다같은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거 읽고 삐지면 너님 째째 인증.) 그러나 오웬은 다르다. 눈 앞에서 그의 말을 싸그리 무시한 여자가, 눈물바람으로 달려와서 '도와줘요' 라고 애원하니 바로 쿨하게 도와준다.

 

너무 많지만 일단 여기까지. 적어도 열가지 덕목은 갖추어야 남자다. 아참. 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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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잘해서 많~이 놀라셨죠?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자. 소년에서 남자로 나아가는 잭도 마찬가지다. 오늘 마침 하교길의 열일곱 수컷들이 득실거리는 땀내 가득한 버스를 탔는데, 십분 남짓한 시간동안 요즘 유행이라는 호흡기 질환보다 호흡곤란이 더 걱정될 정도. 그들과 동년배인 잭은 또 얼마나 멋진 수컷인지. 잭은 공룡이 튀어나오고 쫓아오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남자답게' 모든 미션들을 수행한다. 진짜 남자가 되려면 으레 '모험'을 거쳐야하지 않는가. 위험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경보에도 불구하고 모험심을 발휘해 공룡을 만나러 간다. 남동생-아직 남성이 확립되지 않은-의 수호자로써,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건 우습다. 운전면허 실기는 떨어졌지만, 20년도 더 된 고물차를 수리해서 시동을 거는 놀라운 수리실력을 보여준다. 실기는 쥬라기 월드가 아닌, 인터스텔라에서 치르다 산소부족으로 떨어진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전도 능숙하다. 자기도 모르게 전기충격기를 작동해 공룡을 물리치기까지.

 

 

부록으로 대표도 (어설픈) 헬기운전을 하며, 비상상황에서 조종사 없이 헬기로 현장에 뛰어드는 대범함을 보인다. 난 남자니까~ 워후.

 

 

 

● '난 하나도 안 무서워' :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남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울고 불안해하고 신경질적이다. (엄마는 형제들을 기껏 며칠짜리 공원에 보내면서 공항에서부터 눈물바람, 비서는 신경질적인데 애들한테 신경질내다가 공룡한테 잡아먹힌다. 여자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경고인가.) 나는 어릴때부터 늘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불편했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를 곤란하게 하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다된밥에 재를 후리카케처럼 솔솔 뿌려주는' 역할. <쥬라기 월드>의 주인공 여자는 그나마 용감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그 덕목은 다음과 같다. 1. 하이힐을 신고도 잘 뛴다. 2. 총을 다룰 줄 안다. 3. 운전을 할 줄 안다. 울기만 하는 기존의 여자들에 비해서는 많이 발전했지만, 주인공 여자도 눈물에 늘 눈물이 그렁그렁그렁그렁이다. 

 

 

그에 비해 남자들은 어떤가. 오웬은 공룡 네 마리에 둘러싸여서도 이렇게 말한다.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컴온! 오웬은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도 힘겨운 기색 하나 없다. 여자는 그에 비해 자주 운다. 운전을 하면서도 울고, 부서진 조카의 핸드폰을 발견하고도 울고, 미안해서도 울고, 잃어버린 조카를 찾아서 반가운 마음에도 운다. 잭의 동생 그레이또한 남자지만 아직까지 '남자다움'의 굴레를 모르는 남자다. 놀이기구를 타다가도 문득 엄마아빠가 이혼할까 눈물을 터트리며, 폭포 앞에서도 못 뛰겠다고 덜덜 떤다. 당연하지. 잭은 동생을 남자의 세계로 이끄는 남자다. 애한테 끊임없이 '넌 애가 아니야!'를 반복하고, 폭포에서 밀어 떨어뜨린 후 '놀랐니? 괜찮아?' 보다는 '우리가 해냈다'고 남성으로써의 성취를 격려한다. 그레이도 극이 전개되면서 남자로 성장하는데, 형과 함께 공룡 한마리를 처치한 후 '엄마에게 자랑해야지' 라고 다부지게 말한다. 생에 처음으로 남성으로써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겠다.

 

 

●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 그의 시선은 여자를 향해있다

 

 

열일곱인 잭은 여자친구가 있다. 놀러가서 떨어져있는 동안 여자친구의 사진을 한 두번 정도는 보지만, 늘 다른 여자들에 시선을 던진다. 오웬도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 없을 것 같은데, 공룡에게 목을 뜯길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여주인공에게 갑자기 키스를 퍼붓는다. 상황조정실의 로워리-제이크 존슨.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배우다- 도 비상상황에서 갑자기 동료에게 키스를 하려한다. '왜 이래' '남자친구랑 잘 안되는줄 알았어' '직장이니까 얘기를 안했던거지' '그럼 허그라도...'

 

 

남자가 남자 맘을 어찌 모르겠는가. 감독은 남성관객의 시선도 존중한다. 영화 전개쯔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여주인공은 가슴을 까는데, 그 이유가 '나도 잘 할 수 있어'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웃통을 까면 뭐가 잘 됩니까. 그럴꺼면 나도 웃통까고 면접 들어가요. 적절하게 깐 웃통덕분에, 마치 성화봉송과도 같은 그 장면에서는 비장한 섹시미마저 느껴진달까. 

 

 

 ● '나도 남자다' : 왜 인신공격을 하고 그래요!  

 

 

남자 판타지를 구현해주는 남자들 말고, 또 한명의 재미있는 남자가 등장한다. 상황조정실의 로워리. (내가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jerk 다. 음지에 모셔진 나의 배우님이 이제 빵 뜨는구나.) 이 남자는 남성 판타지와는 거리가 좀 멀다. 직장에 피규어를 죽 늘어놓고, 캐릭터 티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며, 늘 빈정거린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은 그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래도 비상상황에서는 '모두 다 떠나도 누군가는 남아야지'라며 감춰왔던 맨십man ship을 짜내 보이는데, 홀로 상황조종실을 지키는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여자의 한마디 있었으니. '남자답게 뭐라도 좀 해봐요!' 그는 울컥해서 '왜 인신공격을 하고 그래요!' 라고 반응한다. 이 장면이 되게 맘에 남았다. 남자에게 '남자답게' 뭐라도 좀 해보라는 것, 남성 판타지를 강요하는 것은 정말로 '인신공격'이 아닐까. 우리나라 남자들도 어쩌면 인신공격의 가해자인 동시에 대표 피해자들 아니겠나.

 

 

 

영화의 모든 밑밥은 남자가 깔았지만, 결정적 한 방은 왠일로 여자 손에 맡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여주인공들보다 독보적으로 용감성이 도드라진다 싶더니. (혹시 잊었을까봐 1. 힐을 신고도 잘 뛰고 2. 총도 한 방 쏠 줄 알고 3. 운전도 해. 와!) 감독의 의도는 뭐였을까. 영화를 보면서 남성들이 암묵적으로 느낄 '남자다움'에 대한 고단함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동시에, 요즘 점점 드세지는 여성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적당한 해결책이라고나 할까. '그래, 여자 너네들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용감한 종족들이라는거 알아. 인정.'

 

 

엔딩장면. 남자와 여자가 저 빛나는 햇살을 등지고 서있다.

여자가 묻는다. '이제 어떡하죠?'

가만히 있어도 멋진 남자가 '같이 붙어있어야죠. 함께 살아남으려면' 이라는 대사와 함께 윙크인듯 윙크아닌 윙크같은 한 방을 날린다.

여자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상화된 아버지에 대한 판타지 : 의존할 수 있는, 나를 지켜주는'가 있다. 이미 같이 있으면서 그의 모든 면면을 체크한데다, 그는 나를 줄곧 지켜주지 않았던가. 이상화된 남성 판타지는 여주인공뿐 아니라 여자관객까지 미소짓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모 남자친구 멋지다. 저런 남자 만나고 싶다'  

 

 

 

(*) 남성들이여. 그대들은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