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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_ 여자들아, 정신차리자 (1/100)

어젯밤, 같이 사는 친구의 진두지휘 하에 처음으로 셀프 염색이라는 것을 (당)해보았다.

염색약을 바르고 걱정스런 맘으로 앉아, 내가 바른 제품의 후기를 검색했는데

'색은 숯검댕이가 되고, 결은 개털이 된다'라는 120여개의 혹평 발견.

두려움에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패키지에 그려진 모 뷰티살롱 원장님의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가

내게 뭔가를 말하는 듯 느껴진다. 기분 탓이겠지.

 

 

 

 

 

'너도 결혼하면 저렇게 해 줄 수 있어?' 영화관에서 옆자리를 지키던 남자친구의 귀엣말. 함께 보고 있던 영화는 일본 영화.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일본 여성이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앉아 남편의 출장 가방에 옷가지를 착착 개켜넣는다. 옷 개는걸 무척 싫어하고 소질도 없는 나지만 '그으럼!' 이라 대답했다. 세글자 중에서 앞뒤를 다 뺀 한 글자가 내 진심이었다만. '으!'

 

 

<남자를 위하여>는 몇 해전, 출간 당시부터 줄곧 읽고 싶었던 책이다. 살아오며 부딪친 남자들의 말도 안되는 '자뻑'을 숱하게 목도한 여자 사람으로써 '도대체 이 종자들은 어쩌자고 이토록 파렴치하게, 열심히, 적극적으로 뻔뻔한 것인가!'에 대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남자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꺼내보이다니, 이후 이 남성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운' 내용이 담긴 책이다. 도대체 왜?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내 주변의 남자들을 떠올렸고, 나와 남성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며, 나의 이중적인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성격은 유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이 된다. 부모의 입맛에 얼마나 딱 맞게 구는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의 양이 정해진다. 나의 주변사람들은 - 심지어 20년 가까이 본 친구라 할 지라도 - 나를 굉장히 사랑받고 자란 철부지 막내딸 정도로 본다. 철도 없고, 고생도 고민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만 쫓아사는 동화속 앨리스랄까. 나의 유년기와 성장 과정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고 싶지도, 굳이 이해받고 싶지도 않아서 입을 꾹 다물지만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中>라는 글줄을 귀애하여 가슴에 품고 지냈다.

 

 

나의 아버지는 칠남매의 넷째로, 아버지를 예닐곱살에 여의었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우악스러웠고- 여자 홀몸으로 칠남매를 키워내는데, 우악스럽지 않으면 정말로 어쩔 것인가 - 자식에게 사랑을 줄 줄 몰랐다. 중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교복도 해주지 않고, 책을 다 뺏어 불을 질렀으며 일을 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했다. 아버지는 성장 과정 내내 모성 결핍에 시달렸을 것이고, 스스로 그 결핍을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자답지' 못한 것이라 여겨서. 아버지는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서 해병대로 들어갔고, 무참한 폭행을 당하고 몸과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새기고 제대했다. 그게 남자라면 남자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남자가, 사랑이 들어가야 할 빈 공간에 폭력을 채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성장기 내내 아니 성년기에도 지겹도록 지켜봤다.

 

 

나의 어머니는 삼남매의 둘째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유명 법대를 졸업하고 법관의 꿈을 키우다가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오빠와 남동생도 모두 아버지와 같은 코스를 밟았다. 유명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머니의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크레파스를 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남편 말이라면 납작 엎드리는 분이어서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머니는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학생이었다. 학교 선생님의 눈에 들어 미대에 진학하라는 추천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아버지는 여자라서 대학을 보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라는 내내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못했고, 어머니의 오빠나 남동생도 어머니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어머니는 남자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남자들과 건강한 관계 맺는 법을 배우지 못한채,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남자다.

 

 

나는 성장기의 대부분을 부모에 대한 깊은 원망과 적개심으로 보냈다. 나의 부모는 그들의 부모에게 받은 상처들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발버둥을 쳤다는게 맞는 표현일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당한 폭력 때문인지, 단 한번도 나에게 매를 들지 않았고 야단을 친 적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의 욕망이 부모 때문에 눌리는 것을 결단코 원치 않아서, 넘치는 책을 사주고 63색의 크레파스를 사주었으며 온갖 학원을 보냈다. 발버둥을 친 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부모에게 받은 상처들이 나를 아프게 했고, 나는 마침 섬세하다못해 부서질듯 예민한 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모든 교과서를 가방이 두어번이나 찢어지도록 이고 다녔다 - 그 덕분에 키가 덜 자랐다고 믿는다. 젠장 - 모든 상황에 대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의 부모들의 상처는 괴물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으므로 어쩔 수 없었고, 내가 대비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것으로 나를 안전하게 지켜야 했다. 부모와도 말을 잘 섞을 수 없었으니 자연히 같은 반 친구들과도 말을 잘 섞지 않았고, 모든 공부를 1등을 했다. 아무도 나에게 함부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마음이 들었다.

 

 

'남자들이 그토록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유아기에 받은 애정의 양과 관련이 있다...어떤 아이들은 자신이 잘못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자기가 집안에 필요한 존재인지, 부모에게 유익한 자식인지 거듭 되묻고 확인한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부모를 돕는다.' (p.87)

 

 

어머니는, 우리가 자라는 내내 '너희들이 나의 자존심이다' 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와 한살터울의 남동생은 이상하리만치 어머니의 자존심을 세워주는데 미련도, 소질도 없어보였다. 두발검사를 피해 새벽 다섯시에 등교하는 성실함은 보였지만, 시험을 위해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는 노력은 없었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자식의 피해의식과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켜야한다는 장남의식이 뒤범벅된 채로 자랐는데, 부모와의 모든 정서적 교류를 차단하고 실적을 내는데 주력했다. 어머니가 매를 들면 동생은 매가 닿기도 전에 땅바닥에 자지러지며 눈물바람으로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렸지만, 나는 '그래, 올테면 와봐라.' 하는 심정으로 이를 꽉 깨물고 매를 맞았다. (그래서 꼭 몇 대 더 맞았다. 독한년이라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을 나름의 보복이라 여겼고,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리지 않았다. 유학을 가는 날 배웅을 저지했으며, 돌아오는 날에도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고 혼자 집에 돌아왔다. 모든 고민과 감정을 혼자서 처리했다. 익숙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독립적'이라며 기뻐했다. 어머니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고 또 슬펐다.

 

 

'여자가 꿈꾸는 남자도, 남자가 꿈꾸는 여자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p.23)

 

 

이상하리만치 대인관계에 능했다. 내 감정과 고민은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으면서, 친구들의 고민은 그렇게나 잘 들어주었다. 특히 남자들과 재빨리 친해졌다. 성장과정 속에서 유일한 여자 관계였던 어머니와 -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모도 없다 - 살갑게 감정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었으니,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묘한 지루함을 많이 느꼈다. 때로는 속마음을 드러내 여자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다. 속된 말로 '여자 정치'를 잘 못한거다. 배운 적이 없으니. 나의 어머니 역시 그랬고. 왜 입은 옷마다 칭찬을 해줘야하며, 평생 살면서 마주칠 일도 없는 연예인 이야기에 열을 올려야 하며, 옷 한벌을 사러 백화점을 수십바퀴 돌아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본인의 취향에 그렇게나 확신이 없는건지 몇 번이나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친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적도 많다.

 

 

'남자들은 여성을 통해서만이 안전한 곳, 내면, 치유되는 곳에 이른다고 느낀다.' (p.160)

 

 

남자들과는 말이 잘 통했는데, 아마 내가 무의식적으로 남자들의 '정서적 친밀 욕구'를 채워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도 역시 부모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친밀함의 욕구를 남자들과의 대화에서 충족했을테고. 여자들과는 아무래도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남자와 반대 성性이라는 것에서 늘 터졌다. 나는 남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나를 남자라고 정의하고 있었으니까. 한번도 '오빠'라는 말을 내지 못했고,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지는 연장자에게도 '야!'로 일관했지만 그들은 딱히 기분나빠 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것인데,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즉각 얻어터지지 않았을까싶다.

 

 

남자는 눈 앞의 여자를 여자로 여겨 '야!'도 받아줬는데, 이 여자는 '왜 나를 여자로 보느냐, 결국 너도 똑같다'며 길길이 날뛰고 화를 내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나의 뒤틀린 성 정체성은 남자와의 일대일 관계, 즉 연애에서 폭발했는데 어떤 형태의 연애든 겪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내 성체성을 확립 못해 쩔쩔 매고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웃은 이유는, 내가 만나본 남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책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많이 만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비슷하다는 것이겠지. 나 또한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고. 연애를 할 때마다 '이 남자의 A부분이 너무 싫어. 다음엔 B부분을 갖춘 남자를 만나겠어!'라며 나름 고심하여 연애하였으나 알고보니 그 남자가 그 남자라는 진실. 내가 남자의 A,B,C를 생선가시 바르듯 골라내며 고심한 것도 결국 여자들의 '남자에게 내 인생을 의존하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에 다름이 아니었고, 아버지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남자친구들에게 채워달라며 길길이 날뛴 셈이다.

 

 

'여자들은 연인이나 남편이 내면에 있는 이상화된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p. 23)

 

 

대학입학 후 잠깐 만난 복학생 선배는 질투심이 너무 많아서 싫었고, 그 뒤에 만난 남자는 스킨십을 좋아해서 싫었고, 졸업 무렵에 만난 남자는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고 무기력해 싫었다. 다음 번엔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지 했는데 일 중독자였으며, 일과 삶에 균형이 잡힌 남자를 만났는데 마마보이였다. 그 뒤에 만난 남자는 자기 삶에 책임감 없이 자꾸만 회피하려해서 싫었다. 특히 그는 '남자다움'에 대해 요구되는 많은 것들이 불편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남자 특유의 '존심'을 세웠다.  

 

 

그런데 모든 남자는 질투심이 넘치고, 스킨십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며, '남자다움'이란 틀 안에서 무기력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과도한 성취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며, 늘 정서적으로 엄마를 꿈꾼다. 남자는 모든 존재와 경쟁하며, 여자라고 예외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남자의 본성들을 싫다고 하나씩 쳐내고 쳐낸 셈이다. 무엇이 더 도드라졌느냐의 차이일 뿐.

 

 

'그러니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도 사실은 단 하나인 셈이다.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혼신을 다해 보살펴주는 이상화된 엄마 이미지를 구현하는 여자. 하지만 현실에는 그런 여자가 없기 때문에 남자들도 자주 화를 낸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엄마처럼 대해줄 줄 알았다' 라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p.23)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남편이 일어나기도 전에 곱게 차려입고 무릎을 착 꿇고는 '여보, 아침드세요. 출장 가방은 제가 준비해놨어요.' 이거 난 못한다. 백번 양보하면 아침은 차릴 수 있는데, 가방은 못 싸준다. 옷을 개는 유전자가 없다. 군대에 갔다오면 배우려나. 일곱살 때인가, 남동생이 밥을 차려달라고 했을 때는 '이 자식아. 니가 언제 누나 밥상 한번이라도 차려봤어?' 라면서 주먹을 냅다 갈기지 않았던가. 불쌍한 내 동생. 엄마가 집에 없으니 누나에게 엄마 노릇을 대신 부탁한 거였는데, 뭔가 뒤들린 네 누나는 '내가 형이었으면 니가 나한테 밥 차려달라고 했겠냐!' 분풀이를 했으니.

 

 

그러니까 <남자를 위하여>는 결국에는 여자를 위한 책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남자 없고, 너희들도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적당히 욕구타협하며 살자. 어차피 이 외로운 세상, 서로 기대가며 잘 살아보자는 것이니까.

 

 

'남자들이 그녀들에 대해 그랫던 것처럼, 그녀들 역시 남자들에게 터무니 없는 것을 기대해왔고, 말도 안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불평, 분노했음을 깨달았다'

 

 

 

(+) 책의 끝부분을 좀 남겨두고 서평을 썼는데, 역시 말미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남자가 이르고자 하는 내면의 감정에 도달하도록 안내해줄 사람은 여자밖에 없다. 오직 여자만이 부드러운 공감의 손길을 건넬 수 있다. 남자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자가 도와주어야 한다.' (p.291)

 

 

나는 남자들과 이야기가 잘 통하는 여자라고 앞에서 언급했는데, 왜 그랬는지도 알 것 같다. 나는 한번도 그들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적이 없다. 나에게는 이중잣대가 있었다. 남자친구에게는 '남자다움'을 기대했다. 세상 앞에 언제나 씩씩하고, 온유하며, 여자를 위해 헌신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남자. 내가 기댈 남자니까 당연히 그래야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를 제외한 모든 남자에게는 '남자다움'을 기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의 소중한 벗 아닌가. 그들의 내밀한 두려움을 들어주었으며, 세상의 섬세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해 함께 웃었다. 그러다 그들이 나를 여자로 좋아하면 화를 냈다. 남자는 사실은 그런 여자가 필요한 것 뿐이었는데. 나의 무의식 저변에는 '이렇게 두려움많고 감정적으로 나약하고 눈물많은 너에게 내가 어떻게 기댄단 말이냐!' 하는 여성 특유의 불안감이 역력했으리라.

 

 

'서글픈 것은 남성들이 이미 여성적인 요소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는 점이다.' (p.295)

 

 

대화 중에 이모티콘을 많이 쓰는 남자를 안다. 그가 어느날 '친구가 그러는데, 여자들은 이모티콘을 많이 쓰면 싫어한다면서요?' 라고 물었다. 뇌를 거칠 필요도 없이 바로 답장을 찍어 보냈다. ' 그 친구는 인기가 많아요?' 인기있는 남자들은 그거 고민할 시간에, 웃는 이모티콘 하나라도 더 찍어보낼테니까.

 

 

어찌보면 참 사소한 메신저에서까지 남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자다움'을 강요받고 스스로를 검열하는구나. 보나마나 저 속설은 한 여자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으려나. '오빠, 오빠는 왜 이렇게 이모티콘을 많이 써? 여자같이.' 내 남자는 '남자답길' 바라는 여자의 한마디가 오빠의 가슴에 비수되어 꽂힌다. 오빠는 다시는 이모티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끔 기분좋은 날엔 절제해서 삿갓 두 개^^ 정도 날려주는 근엄한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남자들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잘 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두어시간은 거뜬하게 폭풍수다를 떨고, 마치 여자애들처럼 통화 말미에는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로 끝을 낸다. 여자친구와도 이렇게 수다를 떠나? 궁금증이 밀려오지만, 여자친구 앞에서 이렇게 조잘거리는 모습은 '싸나이 가오'가 떨어지니 아마 자제하지 않을까.

 

 

'남자들은 이중부담을 짊어지는 것도 같다. 한편에서는 가정과 나를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가 요구하는 민감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해내라는 거지?' (p.320)

 

 

"넌 늘 정신적인 비타민이 있잖아." 얼마전 만난 친구의 말에 뜨끔. 남자 친구가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다른 남자와 훨씬 친밀한 나의 연애 행태는 늘 죄책감과 혼란을 불러왔는데, 굳이 입밖에 꺼내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간파하고 있었나보다. 그러니 연애를 해도 뭔가 텅빈 느낌일 수 밖에.

 

 

나의 혼란한 연애 행테에 대해서도 이제사 이해가 된다. 아버지에게 충족받지 못한 사랑을 채워줄 '이상화 된 남성'을 찾았던 동시에, 여성 특유의 기질과 친밀함을 발휘해 남자들이 감정 표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우며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동안 늘 이중적인 연애 행태를 고수하면서도 이 두 가지가 합치된 남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처럼 - 상상하기 싫었겠지. 나의 이상형이 사실은 눈물도 많고 여리고 나와 똑같이 두려움이 있다니. 그래서 늘 남자친구들부터 도망치지 않았던가 ! - 남자들도 이 상반되는 성정을 한 몸에 집어넣으려니 오죽 고단할까 싶다. 이모티콘의 비유로 따진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남자는 이모티콘은 쓰지 않고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마치 시적 언어와도 같아서 여자에게 위안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며, 그 감동은 천개의 이모티콘을 붙인 것보다 더 통렬한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내가 남자라면 여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한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러나 그 와중에도 꼭 저런걸 해내고야마는 미친 수컷이 반드시 있다.)

 

 

여자들의 이상형 항목에는 일반적으로 빠지지않고 '존경할 수 있는' 이라는 조건이 꼭 들어간다. 나도 그렇고 주위의 내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렇다. 여자들은 다들 '어른'을 찾는다는 소리다. 남자친구가 이상적인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거다. 나의 아버지는 존경하기엔 너무 약하고, 감정적이고, 일중독자이고, 표현에 서투르니까. 이유야 얼마든지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 나의 역할. 남자를 '남자다움'안에 구겨넣지 말 것이며, 일반 남자에게 그러하듯이 내 남자의 여성성도 충분히 존중해줄 것. 내 남자만은 이 세상 풍파에서 나를 지켜주고, 미래에 대한 엄청난 확신과 끈기가 있고, 흔들림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가정을 위해 헌신해야한다는 생각을 버릴 것. 다큰 남자들이 아직도 엄마의 치마폭을 파고 들고 싶은 것처럼, 내 남자의 두려움과 약한 모습을 인정해 줄 것. 그런 모습을 내게 보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정서적인 쿠션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 현명한 조력자인 동시에 친구가 될 것. 같이 손잡고 해쳐나갈 것.

 

 

존경대신 존중을 택하겠습니다. 내 남자여.

 

 

 

(*) 그나저나 서평을 이리 길게써서야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