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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6월 5일 : 아름다운 이 유월

 

 

△ 이 계절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

 

 

 

버스에 아끼는 우산을 두고 내렸다. 사무실에 놓고 나왔다가 부러 다시 들러 챙겨 나온 것인데, 잃어버리려고 챙긴 셈이 되었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때로는 챙기려다 잃어버리기도 하니까. 잃어버릴 우주적 타이밍 앞에서는 나도 어찌할 재간이 없다. 검정색의 날씬한 장우산. 검정색 우산을 쓰고 다니는 나를 보고 오래 알던 친구가 '우산이 의외다. 너라면 화려한 꽃무늬나 밝은 원색을 쓰고 다닐 것 같은데' 라고 말한 적이 있을만큼, 어쩌면 검정색 우산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을 수도 있겠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삶에 검정색을 좀처럼 들이지 않는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검정색 옷을 입어본 적이 거의 없다. 졸업식 때 입은 검정색 원피스와 그 뒤 몇 번의 면접 때 입은 정장을 제외하고는, 여태 살아오며 검정을 입거나 지닌 적이 좀처럼 없다.

 

검정색 우산은 작년 이 맘때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준 것이다. 펼쳐지는 모양이 예쁘다며 어딘가에서 가져와 나에게 준 것인데, 그 뒤로 그 우산을 퍽 좋아하게 되어 줄곧 쓰고 다녔다. 서울에서 몇 해의 여름을 보내면서 - 여기는 뭔 놈의 비가 그리도 줄창 오는지 - 집에 적지 않은 우산이 있었지만, 그 우산 하나만 부지런히 쓰고 다녔다. 이번에 이삿짐의 대부분을 고향으로 실어보내면서도 우산 한 자루만은 남겼는데, 잃어버리려고 그랬나 싶기도 하고. 

 

물병자리의 특징 중 하나인 '과거지향적' 이라는 말은 나에게 굉장히 잘 달라붙는다. 사랑은 남아있지 않아도 기억은 남기고 싶어하는 내게, 과거의 내 소중한 시간을 증명하는 물건만큼이나 좋은 것이 있을까. 지금쓰는 핸드폰의 케이스도 2년째 바꾸고 있지 않은데 - 심지어 지난달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는 '무슨 여자 핸드폰이 이렇게 지저분해요' 라는 말을 했고, 지금 함께 사는 친구는 핸드폰 케이스를 새로 사주겠다고 했다. 왜. - 우산남과의 연애 전에 만났던 친구가 똑같은 두개를 사 선물해 준것이다. 나는 아직도 대학교때 잠깐 연애한-감자탕 집에서 새벽에 헤어졌던- 놈과의 커플티도 잠옷으로 잘 입고 있고, 대학교 졸업 후에 만난 남자친구와 마련한 커플 잠바는 비싸게 주고사서 버리질 못해 아직까지 잘 입고 다닌다. 그 뒤 겪은 몇 번의 연애에서도, 지니고 있던 핸드폰 케이스나 작은 물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아 지난번에 남자친구가 사준건데' 라고 말을 꺼냈다가 감정싸움으로 번진 적이 더러 있다. 결국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고. 이렇게 구남친, 구구남친, 구구구남친, 구구구구남친...을 나열하다보니 내가 굉장히 연애를 많이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나는 연애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문득 느꼈다고 하지 않았던가. 20대를 통틀어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같이 느껴진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겠지만 핑계대지 않은 이유는 속이고 싶지 않았고, 나의 의연함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 봐. 난 이제 이런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니까? 허허! 하고. 상처주려고 했던건 결코 아니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나는 좀 속상해도 그 사람에게 더 많은 매력을 느꼈을 것 같다. 이 사람, 지난 사랑도 참 예쁘게 간직하는구나- 싶어서. 뭔 개소리야?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쓰다보니 개소리다. 내가 왜 그랬지? 다시 시작될 사랑 앞에서 나는 과거의 모든 久 연애적 유물 및 기억, 감정을 청산하고, 마치 모태솔로의 그것과 같은 마음으로 연애에 집중하는 이 시대의 사랑꾼으로 거듭 날 것을 다짐합니다. 충성!

아무튼 우산은 갔고 과거의 기억도 갔다. 이제 비올때 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매개가 없다. 잃어버리려고 잃어버린 건 아니다.

 

 

*

 

 

 

원래 쓰려던 글은 유월의 아름다움에 관한 글이었는데 어쩌다 옆길로 샜다. 아 처음부터 옆길로만 가고 있었구나. 아무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한마디 하자면, 유월은 정말 아름답다! 이름도 순한데다 한해의 딱 절반을 잘라먹는 과정이라는 것도 맘에 든다. 요즘은 참 이 계절이 좋은데, 원래 봄을 그렇게나 좋아하다가 기후이상으로 봄이 점점 짧아지니 내 나름대로 유월까지 좋아하자고 타협안을 내놓은 것 같다. 봄만 좋아하다가는 한해한해가 갈수록 점점 슬퍼할 일 밖에 남지 않았을테니까. 좋아하는 무엇이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큼 슬픈게 있으려나.

 

노력하지 않아도 이 계절이 참 좋다. 눈을 들면 곳곳에 늘 초록이 있고, 예고없이 적당히 흩뿌리는 비도 좋다. 아이스티로 아침을 열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장미가 지려하는 이 계절이 얼마나 달고 아름다운지. 술을 못 하는 나도 언제나 여름이면 맥주가 많이 마시고 싶다. (아 쓰다보니 맥주 마시고 싶다.) 우리 가족들은 나만 빼고 죄다 한여름에 태어났는데, 부모님 생신은 음력으로 셈하다보니 세 사람의 생일이 같은 달에 몰려있을때가 많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얼마나 우스운지, 우리 가족들의 별자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렬로 늘어서있다. 하늘에서도 같이 있고 싶다는거지? 나만 쏙 빼고.

 

나는 한겨울 생인데 겨울과는 체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전혀 궁합이 맞지 않아서, 늘 내 생일이 여름이 아닐까 의심을 많이 한다. 추위를 몹시 타고, 귤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눈을 반가워하긴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어울리는 계절이건만 커피는 입에도 못대지, 초록잎 달린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데 초록색은 코빼기도 안 보이지-미국씌벌친구인 유무선군의 제보에 의하면 '사철나무'가 있습니다-  맥주 먹기엔 왠지 춥고 처량하지, 그렇다고 소주는 못 마시지. 부츠도 잘 안신으니 할 말 다했다. 그나마 겨울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코트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는 것 정도. 저녁이 빨리 오는 겨울은 정시 퇴근도 괜히 야근한 것만 같아 더 쓸쓸하고,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컴컴한 어둠이 차지해버린 것 같아 싫다. 유월이 생일이면 참 좋겠다. 내 생일의 달과 날을 바꾸면 유월 이일인데, 어디 여름 생산인데 겨울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 없을까나.

 

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생일들에 대해서 나열해본다.

 

* 11월 4일 : 초등학교 친구 김원영의 생일. 물론 초등학교 졸업이후 연락한 적 없음. 왜 기억하고 있느냐. 부모님 결혼 기념일 다음 날이다.

* 11월 12일 : 구구구남친 생일. 첫 만남에서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는데, 빼빼로데이 다음날이예요 라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젠장. 잊고 싶다.

* 6월 17일 : 어. 얼른 다이어리를 꺼내 적어두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골동년의 생일. 한동안 못 외워서 6 더하기 1은 7로 외워두었다.

* 12월 19일 : 역시 같은 시기에 사귄 나의 가장 오래된 골동년의 생일. 작년이었나. 생일이라 밥을 사주려고 했는데, 친구가 자연스럽게 계산해서 좀 이상해졌다.

* 8월 25일 : 남동생 생일. 8월의 크리스마스. 갖고싶은 선물을 물어보면 십수년동안 한결같이 '옷' 이었다. 올해도 옷이겠지.

* 11월 3일 : 구구남친 생일. 개천절.

 

 

 

* 요즘은 어찌됐건 뭐라도 쓰자는 심정으로 꾸준히 쓰는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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