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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5월 18일 : 가만가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여기저기 전화를 넣었다. 전기요금 자동이체를 해지했으며, 다음주 가스검침원 방문 및 요금 정산을 예약했다. 곧 재발급될 카드와 다음주에 발송될 택배의 주소지를 변경했으며, 이미 두달전에 예매해두었던 발레 공연을 취소했다. 2주 뒤에 있을 공연은 자리가 무척 근사하기에 취소를 아직까지 망설이는 중. 이 와중에 이사를 끝낸 뒤에 리장으로 훌쩍 날아가버리는 건 어떨까, 싶어 중국 비자 발급 서류를 체크해보고 있다. 두 달전 작은 교통사고로 다니던 병원의 영수증도 처리를 해야할 것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차가운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세입자도 잘 구하고, 떠나기 전 전기와 가스 따위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잘 쌓아올리고 또 허물 줄도 아는구나. 너란 아이는. 아, 이제는 아이가 아닌가.

 

집주인을 만나서 떠나겠다는 말과 함께 세입자를 이미 구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전했다. 집주인 아줌마는 반색을 하며 집안으로 나를 앉혀 참외며 사과를 깎아주었다. 그리고 나를 참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 집에는 내리 2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한 번도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없다가 떠날 무렵에야 수줍은 마음을 고백하는 것인가. 어쩌나. 셔츠의 두번째 단추라도 질끈 떼어 드려야하나. 아가씨, 참 좋았는데. 아가씨 같은 세입자 없어. 언제 일어나는지 언제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 아가씨 시집갈 때 까지 살려나 했었지.

 

나의 후계자(?)도 조용한 또래의 여성이라고 전하며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아주머니가 "아유, 사람이 저렇게 착해. 착해." 하신다. 착하다의 의미가 문득 궁금해서 사전을 뒤져보았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라고 씌여있다. 마주침도 거의 없어 나의 언행이나 마음씨는 살필 겨를이 없었을텐데도 착하다 착하다 하신다. 언제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모르실 수 밖에. 회사를 다닐때는 늘 아침에 후다닥 집을 나섰으며, 회사를 다니지 않을때는 하루종일 누워 있었으니까. 문득 한달의 절반이상을 딴 나라에 가있기도 했으니까. 2주정도 태국을 다녀온 귀국날 아침에는 현관의 비밀번호가 바뀌고 집주인 연락도 되지 않아, 현관 앞에 캐리어를 깔고 그 위에 앉아 빵을 먹으며 현관문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가 외출하는 집주인과 마주치기도 했다. 피식.

 

6월에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솔로몬에게도 '메이비 아이 캔트 미트 유' 메세지를 보냈다. 솔로몬이 너의 뷰티풀 페이스를 보고 싶다며 미국산 뻐꾸기를 마구 날려주었다. 뻐-ㄹ 꾹. 뻐-ㄹ 꾹. 갑자기 어릴 때 집에 있던 뻐꾸기 시계가 생각난다. 뻐꾸기 시계를 하나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