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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5월 17일 :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아무도 꿈에도 모를거야

 

내가 우리 동네를 얼마만큼 좋아하느냐. 비행기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의 풍경만큼 좋아한다.

 

 

 

(인터넷에) 방을 내놨다. 하루만에, 아니 일분만에 결정한 일이다. 관심도 없던 집이며 땅 따위를 갑자기 몹시도 갖고 싶다고 이 동네에 정을 붙이면서 줄곧 생각했었다. 내리 삼년을 살았는데도 이 곳이 안고 있는 풍경이 좋아서, 그리고 이 곳에 묻어있는 내 모습이 좋아서 이 동네에 내 집 하나 있었으면 소망한 적이 적지 않다.

 

갑자기 많은 낯선 번호들이 내 핸드폰을 울렸고- 이력서를 쓰는 중이었다면 낯선 번호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뛰어 진즉에 미쳤을 것이다. 한동안 면접을 보러 다닐 때는 울리는 모든 전화에 일단 심쿵했고, 받을 때 공손을 넘어 읍소 했던 것 같다. 눼이눼이-, 아침부터 낯선 얼굴들이 내 방을 구경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려 하는 이도 있었다. (여기는 모델 하우스가 아니고 그냥 하우스 입니다. 척봐도 제가 모델이 아니잖아요.) 원래 오늘의 글에 붙이려던 제목은 '2015년 5월 17일 : 네가 네시에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하면' 이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방을 보여준다는 것이, 아는 사람들에게 방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쑥스럽고 긴장이 되기도 해서 괜히 아침부터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대충하고, 이불도 잘 개어놓고는 시계를 흘끗흘끗 보면서 어쩔 줄 몰랐다.

 

네가 네시에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하면 제발 좀 와야 될 것 아니냐, 이분들아. 실컷 오는 중이라고 했다가 '아 미안요. 다른 집이랑 착각햇어요' 라는 사람도 있었고, 한 시간이 늦는 사람도 있었고, 나도 모르는 낯선 동네에 서있다며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다. 방안에 드리운 분홍색 커튼이 분위기를 한껏 살렸는지 어쨌는지, 방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오늘 들른 사람들 중에 나와 비슷한 나이인 아가씨는 내 방을 마음에 들어했다. 나보고 글을 잘 썼다며 오고싶은 마음을 부추겼단다. 햇살이 잘 드는 적당히 감성적인 사진들과 함께, 이 동네의 맛집과 교통편,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을 적어둔 것이 좋았나보다. (히죽) 냉장고도 열어보려하고 (온 몸을 날려 저지했다!), 장농도 열어보려 했으나 나에게 저지당했다. 다행히 변기와 수도는 마음대로 테스트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그 아가씨 얼굴을 보면서 '이 방에 당신이 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 방이랑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그녀가 이 방에 살게 될 것이다.

 

 

*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멕시코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멕시코는 싫다고 해서 그 옆의 베트남 식당에 가려고 했다. 베트남식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였는데, 샌드위치는 싫다고 하여 중식집에 갔다. 탕수육과 중국식 냉면과 마파두부볶음을 먹었다. 이것저것 침울한 얼굴의 나에게 친구가 "맛있는거나 먹자. 어차피 인생은 즐거울려고 사는거니까."라는 말로 위로해줬다. 불과 몇 개월전에 내가 들려줬던 말들을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구나. 밥을 먹고는 술을 한잔 하고 싶대서, 오픈도 하지 않은 작은 맥주집에 앉아 맥주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하하하, 그거 아냐. 며칠 전에 면접보고 나와서 울었잖아." 면접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적한 마음에 울었다는 이야기와, 그런 나를 사람들이 면접때문인 줄 알고 딱하게 여겨 와플을 사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온갖 곳에서 청승이라며 친구가 중얼거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했나보다. 술이 좀 올라서는 "나 진짜 여기가 너무 좋아! 가기 싫어!" 라고 울먹였다.

 

내가 이 동네에 살기 시작한 이유는 동네 이름이 예뻐서였다. 언젠가 끄적여둔 글이 있다. 처음에는 명륜동에 살고 싶었다. <명륜동>이란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만큼 이름도 예뻐서 명륜동에 무작정 살고 싶었다. 명륜동에 집까지 알아보고 가계약까지 했었으나, 우리 동네에 살게 된 것은 어쨌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인연이거나.

 

꼬박 삼년을 살면서 이 동네의 흥망성쇠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좋아하는 가게들이 건물주에게 쫓겨나 저 멀리로 사라졌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가게들이 오르락 내리락. 취향도 없던 내 친구는 내 덕분에 취향이 생겼다. 취향타던 나는 한층 더 고루해졌다. 팥빵은 여기, 빙수는 여기, 만두는 여기, 탕수육은 여기, 커피는 관심없지만 커피는 여기. 피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갑자기 한번에 다 모여있어서 너무나 깜짝 놀라고, 너무나 행복했는데. "거긴 한강도 없고, 니가 좋아하는 그 까페도 없지롱." 나를 약올리는 친구에게, 삼년동안 쌓은 정보를 바탕으로 근사한 비밀 맛집 지도를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맥주를 다 마시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까페에 가서는 '하나도 안 예쁘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 어허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