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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4년 10월 5일 : 가지마

 

△ 한밤의 단팥죽.

 

 

 

여유도, 의욕도 생기면 '어디 한번 글이나 써볼까' 싶은 날이 있습니다. (흔하진 않지만!) 몸 안에 그 날의 생각과 감각들이 간질간질 살아있어서 이걸 얼른 뱉어내고 싶은데, 뱉어서 오래오래 보고 싶은데 그토록 간질거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노트북이 말을 듣지 않아요. 인터넷이 안된다거나, 키보드 입력이 안된다거나. 하루 묵혀 차게 먹는 카레는 맛있다고 하지만, 하루 묵힌 생각과 감각들은 자는동안 옅어지고 때로는 잃어버리기도 해서 여간 안타까운게 아니네요. 

 

어제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는데, 아쉽게도 키보드만 벅벅 두드리다 겨우 한 줄 쓰고 끝나버렸다는. 어제 겨우 한 줄 쓴 문장은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원래 잠이 별로 없어요. 인생에서 늦잠을 잔 날은 손에 꼽을 정도. '늘어지게 잤다 입니다.

 

생각과 감각과 감정들을 간밤에 소실消失하고, 말끔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어제를 반추합니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 서대문구를 벗어났습니다. 그리 머지 않아 보이는 북한산 봉우리가, 말간 가을 하늘아래 예쁘게도 빛나더군요. 공기는 어찌나 맑고, 새소리는 또 얼마나 듣기 좋은지. 이 도시에 오래도록 머물 거처를 정해야 한다면 이 동네 어디 쯔음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름 의미 있었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네시. 하루종일 굶고 나름 신경을 바짝 세운 탓에 집으로 오니 한순간에 피곤이 엄습합니다. 몸을 추스릴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뭐라도 먹으려면 밥을 해야하고, 또 미뤄둔 빨래도 주말을 이용해 해두지 않으면 안되기에 불려둔 쌀로 밥을 안치고, 세탁기를 돌립니다. 가만히 드는 생각이 '나밖에 나를 돌보는구나.' 하는 생각.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냥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나를 먹여야하고 씻겨야하고 아름답게 해야하고 다독여야하고 다그쳐야한다는 이 모든 행위들이, 내 통제 아래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고. 나 이외에 내 삶에 아무를 들여놓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말예요. 

 

늦은 식사를 하고, 버티면서 밀린 TV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여섯시 경이었나 잠시 잠을 청했습니다. 겨울이 와요. 벌써 온 세상이 푸르스름하더라구요. 불을 꼭 잠근 방에서 까맣게 누워있는데, 열린 창문 사이로 아주아주 가느다란 파란 빛이 새어나옵니다. 직선의 그 빛을 꼭 잡고 싶었어요. 놓쳐버리면 안될 것 같아서, 그 빛을 잃어버리면 그야말로 완전한 어둠에 잠길 것 같았는지 피곤한 잠결에도 자꾸만 잠을 놓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가지마." 깊게 잠들지 못하고 핸드폰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는데, 어둠이 완전히 내린 까만 방과 차가운 공기가 어제따라 유난해서 얼른 불을 켰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얼른 얼른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얼른. 

 

평소에 그렇게 단팥죽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옷을 갈아입고는 30분동안 갈까말까를 고민하다가 까페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그 와중에 하얀색 샤스커트를 입고 집을 나섰네요. 그 추운 밤에. 맨발에 (물론 신발은 신었고요.) 허연 치마를 바람에 너울거리면서 단팥죽 먹으러 가는 여자의 발걸음이란. 어서어서.어서어서. 

 

까페에 도착해서 따듯한 보리차를 마시니 그제야 좀 진정이 되면서,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나도 꼭 집안에 따뜻한 보리차를 마련해두어야지.' 라는 생각을 잠깐하고 주황색 알전구 아래를 찾아 안도의 표정으로 앉았습니다. 단팥죽과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번갈아 맛보면서 일요일 밤을 보냈어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온기였노라고, 나를 알든 모르든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이 소리내어 이야기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필요했었습니다. 어제밤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