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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4년 4월27일 :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면서 '아침엔 숲에 가서 누워 있어야지' 했는데, 비가 내리는 희끄무레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편으로 슬몃 기분이 좋다. 마치 '내일은 도서관에 가야지' 했지만 마침 도서관이 정기휴일이라 갈 수 없는 상황의 마음가짐과 비슷하다.

 

바깥 세상일에 무감하려 하고, 한동안은 더욱 무감하려 노력했지만 일주일동안 몇 편의 공개할 수 없는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했고 비가 내리는 하늘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겠구나 싶다. 나의 세상에 내리는 비는 일단 환영이다.

 

오늘 오후 세시경에 소개팅이 있다. 선배가 내 번호를 투척한 뒤에도 며칠간 연락이 없던 선배의 후배녀석에게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선배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는 것 처럼 느껴져 '전 괜찮다. 부담가지지 말라.' 는 대답을 보냈더니 '내가 시간이 그때밖에 안된다. 오후 세시 8번 출구에서 보자.' 라는 그야말로 담백한 대답이 돌아온다. 뭐야 이자식.

 

어차피 내 스타일도 아니고, 난 어제 잇몸을 찢어서 입주변이 퉁퉁 불어있는터라 소개팅을 취소할까 생각했지만 어제 선배가 나에게 당부한 일들을 상기하며 '까짓거. 잇몸에 피흘리는 여자 한번 만나봐라' 라는 심정으로 나가기로 했다. 선배가 어려워하는 후배녀석과의 소개팅을 애써 망친 뒤 여보라는 듯이 다시는 나를 소개팅 후보로 물망에 올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도 했다. 선배가 나에게 당부한 일은 다음과 같다. '너도 억지로 나온 것처럼, 다시는 안볼 마음으로 본색 다 드러내며 만나봐. 그래야 니 매력이 나오니깐.'

 

남녀관계에 온갖 전문가인 것처럼 자처하지만, 선배의 조언을 들었던 前 편집자는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의 위기에서 과연 선배의 조언대로 했다가 유래없을 상처를 가슴에 안고 모욕적으로 까였고, 선배 역시 본인의 관계가 그리 윤택하지 않은걸로 봐서 (잘되고 싶다면) 믿을만한 조언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인위로 묶는다는 게, 나같은 사람에게는 영 불편하고 어색해서 그동안 소개팅 자리를 고사했던 것인데 이놈의 선배가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몹쓸 코치를 하는걸로 봐서 나의 불편해하고 쭈볏거리는 태도를 제 3자 입장에서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안다!)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2년동안 단 한번도 소개팅을 시켜주려하지 않다가 - 자기 처남에게 소개시켜주려는 시도가 있긴 했다. 나를 가족으로 만든 뒤 평생 괴롭히겠다는 심산이겠지! - 갑자기 동년배의 남자가 입사해 나에게 이런 저런 남자를 소개시켜주려는 태도를 보고, 그제서야 선배도 나에게 '선배다움 + 연장자 남자다움'을 발휘하려는 심산이기도 하겠고. 그리고 내가 소개팅 자리에서 '어떤 얄궂은 능력을 발휘해 남자를 구워삶는지' 보고싶기도 할거고. (선배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 '나도 기대는 안하지만 넌 능력자니깐 어떻게 구워삶을지 기대됨') 자기 혼자 1인용 모드로 키워오던 캐릭터를 대전모드로 내보냈을때 그 능력치를 보고싶은 마음. 그게 딱 선배 마음이다. 1인 모드에서 못봤던 어떤 필살기를 보게된다면 유저 입장에서 참 짜릿할꺼고, 맥도 못추고 얻어터진다면 분하고 쪽팔리는 마음에 게임을 접겠지.

 

아무튼 이래저래 선배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그냥 시원하게 한방 먹이고 오자는 심산으로 일차적으로 생각한건 추리닝인데 (실제로 내 친구의 친구가 소개팅에 나갔는데 무슨 징박힌 가죽 바지를 입고 갔다나 어쨌다나. 남자가 제발 빌면서 '빨간 원피스를 입어달라. 당장 사주겠다'고 했단다. 이래저래 이상하다.)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가죽바지를 입을 필요도 없이, 어제 찢은 잇몸이 나를 도와주고 있고 이와 더불어 어제 밤 아홉시가 넘어서 치킨을 한마리 시켜먹었다. 왠일로. 배달음식이 배다른 음식도 아닌데 배달음식과는 영 거리가 먼 성장환경을 미루어 보면 진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이동네에 산 1년 반동안 단 한번도 배달음식을 시켜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 소개팅을 작정하고 망쳐보겠다는 의지가 빚어낸 식욕인갑다.

 

아침에 일어나니 기대했던대로 얼굴은 적당히 부어 푸석거리고, 비까지오니 '이런 날엔 뭘 입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꾸미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데, 꾸미는 걸 너무 귀찮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가끔 꾸미는게 좋은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머리는 몽롱하고 출사에 대한 고민은 정오쯤부터 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통 안 읽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씨디도 비닐 포장을 벗겨내고 컴퓨터 옆구리에 찔러넣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노래의 멜로디를 간간이 따라 옹앙거리면서 '축가로 어울리나 안 어울리나'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고른 노래들의 가사는 '네 놈이 대단찮은 놈은 아니지만 기꺼이 사랑은 해주마.' 라던가 '네 이놈!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안 해준 놈이지만 어쩌겠냐. 내가 너랑 사랑에  빠졌으니 할 수 없다.' 라던가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 없는 나를 사랑해주니 네 놈에게 참 감사하다' 는 식의 뉘앙스인데, 제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이쁜 줄 아는 부모의 마음에 마이크로 못질을 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 같아서 멈칫 거리게 된다. 게다가 이쁘고 잘난 자식이 세트로 크로스하는 결혼식에.

 

그렇다고 코먹은 소리로 응앙거리면서 '햄볶해~ 햄볶햄볶해~ 햄볶해~' 무의미한 햄을 볶을수도 없고, 소절 끝마다 '베이비'를 열창하며 무사 출산을 기원하기에는 시기가 이른 것 같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책을 읽고 토마토와 비스켓을 먹는 아침이다. 비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