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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잠 못들고, 오늘도 여전히 피곤하겠네

 

△ 아는 분의 동생이 외국에서 찍어 보내준 사진이란다. 근사하다.

 

 

수면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다가, 이렇게 퇴근해서 초저녁 잠이 까무룩 들었다 깨는 날이면 보통 다음날 새벽 3시를 넘겨서까지 잠을 못자고 끙끙거린다. 조금전까지도 잠자리에 누워 괜히 이불을 바로 해보고, 베개를 이리했다 저리했다 폰을 들여다보았다가 결국 불을 켜고 일어나 책을 조금 읽었다. 요즘은 정말로 조금씩 책을 읽는다. 왠일로. (월정액 핸드폰 데이터를 진즉에 다 써버린 탓이 크겠지만.)

 

지난 주에 신촌을 지나가다 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몇 권 샀다. 대형 중고서점이 들어서면서 개인 중고서점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출판사들 역시 출간된지 일주일 남짓 지난 책이 중고서점에서 반값에 버젓이 팔리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워낙 책 사는걸 좋아했고 좋아하는 나는, 새 책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누군가 페이지를 접어놓거나 얼굴에 낙서를 해놓은 중고 책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중고 서점에 종종 들러 이것저것 살피는 재미는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고물이건 보물이건 뭔가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한 법이니까.

 

아무튼 출판사 직원 입장에서는 울어야 마땅하겠지만 - 꽤 신간이 아니라면, 어느정도는 우리 출판사 책이 중고시장에 많이 도는 것이 좋다고 본다. 결국 한번이라도 읽었던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언젠가는 한번이라도 읽을 사람이 생길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 지갑을 여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실 참 반갑다. 여느 대형 서점을 방불케하는 규모에다가 장르별로 보기쉽게 촤르륵 정리가 되어있으니. 내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읽지도 않은채 집에 탑처럼 쌓여있는 책더미를 뒤로하고 결국 또 한아름 품에 안는다. 고르고 골라 겨우 내쳐도 세 네권쯤은 포기할 수 없다. 눈에 익은 이름이 있어 의리상 한 권 집어오기도 했다. 작가의 중고책을 사주는게 뭐 큰 의리랴만은 싶지만.

 

지난 주에 집어온 책들 중 한권이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자, 도쿄>라는 책이다. 그의 <옥수수와 나>가 실린 작품집은 어머니에게 사드린 기억이 나서 이름은 설지 않다만 그의 글을 읽어보는 건 처음이네. (조금전에 분개한 사실은, 중고 서점가와 일반 서점가가 같다는 사실이다. 아니, 인정하긴 싫지만 일반서점가가 더 싸다. 젠장.)

 

워낙 도쿄를 좋아하기도 하고, 벌써 10년전 추억이 되버린 도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문득문득 그립고 선연하기도 해서 집어들었나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p. 233과 236)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깨달음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갇힌 앎을 버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곳, 이를테면 돈암동의 골목길인 노량진의 수산시장을 헤매며... (중략)

 

 

나는 단박에 내가 살고 있는 연희동을 떠올렸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연희동을 얼마나 애정하고 애틋해하는지 잘 알 것이다. 이 부근의 동네들이 품고 있는 어떤 분위기는 이미 서울에서도 정평이 나있어서 주말이면 골목마다 차가 빽빽하고 식당들은 넘쳐나는 손님들을 감당하기 위해 널찍한 홀과 지하 공간까지 갖추고 있다.

 

눈오는 11월, 이 동네에 짐을 풀고 이불도 없는 방 안에 털썩 몸을 뉘였을 때부터 왠지 이 동네가 그냥 좋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발걸음도 동네 여기저기를 디디면서, 이 곳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더 크고 단단해졌다. 동네 곳곳에 위치한 예쁘고 작은, 오밀조밀한 타인들의 삶의 결을 들여다보면서 '아 나 정말 좋은 동네에 살고 있구나' 하는 애동심愛洞心이 불쑥불쑥 발동됐는데, 책을 읽고 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아마 어떤 동네든 그 동네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주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불쑥 낯선 타지에 와서 어디든 마음을 주고, 마음을 비빌데가 필요했기 때문에.

 

좋아서 마음을 비빈것인지, 마음을 비비다보니 시나브로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철저히 혼자인 이 곳에서 나는 계속 여행자이기 때문에 - 내게 여행자의 의미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라는 의미다 - 내가 여행자임을 자주 깜빡하지만, 끊임없이 모든 풍경이 낯설고 좋고 그래서 늘 여행을 떠나온 기분인 이유를 알겠다.

 

이틀전 일요일에 계동을 거닐었는데 참 좋았다. 소담한 꽃 가게와 동네 토박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 아쉽게 맛은 보지 못했지만 - 간판도 없는 허름한 김치찌개 집과 노란 불이 환하게 밝혀진 2층 까페가 있다. 돌아와 4월 달력 한귀퉁에 '계동 산책!' 이라고 조그맣게 써넣어 놓았다. 페이스북에 '산책 코스'를 추천받는다고 써놓으니,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가 '양재 시민의 숲'이 좋다며 귀뜸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 도시에서 한동안은 끊임없이 여행자이고, 자주 여행자 신분을 깜빡하겠지. 삶에 지치고 일상이 고단하면 대뜸 엄마에게 "아, 나 다 때려치고 내려갈까봐." 볼멘 소리를 할테지. 가재미 실눈을 뜨고 팔짱을 낀채 '으, 벗어나고 싶어.' 지겹게 바라보던 골목길을 떠올리면서.

 

 

* 문득 생각난건데, 그래서 연애는 달콤하고 결혼은 지겨운걸까? (지겹다고 하는걸까?)  

언젠가 떠날, 혹은 떠나올 관계는 항상 어딘가 아쉽고 애틋하고 묘하게 달뜬 느낌을 유발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곳, 사람과 것.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