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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자기 성장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만화가 한 명은, 모든 소재를 자기 안에서 끌어올린다. 자신의 발 사이즈, 몸의 어떤 냄새, 식구, 키우는 개, 아빠가 하시는 일, 사는 곳, 전기세를 못 낸 것 등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골수팬인 나는 그래서 그녀가 퍼올린 모든 것을 알고있다. 그녀의 발 사이즈는 일반 여자치고는 좀 큰 255 밀리. 자주 안 씻어서 몸에서 냄새가 나는데 은근히 그 냄새 맡는 것을 즐기며, 식구는 언니와 남동생. 개를 두마리 키우고 있고, 아빠는 골재상을 하신다. 그리고 지금은 빈 사무실을 반띵해서 쓰고 있으며 전기세를 1년동안 안내서 70만원이 밀렸고 최근에 처리했다는 것 정도.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소위 말하는 '언더'에 있지만, 내가 처음부터 단박에 그녀를 좋아했던 이유는 글쎄, 보석처럼 숨겨진 예술가 발견에 유난히 특화된 나의 안목(후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랑 참 비슷해서 그런게 아닐까? 타인의 드라마는 철저하게 귀찮아하고 나의 많은 것에 귀울이는. 오죽하면 밝사님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을까. 블로그를 막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다. 2009년 쯤. "반지야, 블로그 방문자수를 높이고 싶으면 니도 남 블로그에 가서 댓글도 좀 달아주고 해야된데이." 밝사님, 귀찮아서 아직까지 못하고 있어요. 높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잘 지내시죠? 죄송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인 <우리 선희>에 보면 교수가 선희한테 이런 말을 한다. 선희 너는 사람들과 교류도 없고 늘 혼자 닫고 사니까...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이랑 부대껴야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도 알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거라고. 선희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학생이다.

 

비단 영화감독 뿐이겠는가. 싫든 좋든 이런 놈이랑도 엮여보고, 저런 년도 만나보고 그 속에서 싫은티 좋은티 내면서 부대껴봐야 내가 누군지 알수 있다. 저 새끼는 왜 저러지? 저 년은 왜 울고 지랄일까. 이 자식은 왜 이 모양일까.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 쟤는 왜 저렇고, 얘는 또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끊임없이 타인에 대한 판단과 궁금증이 올라오게 마련이고, 결국은 그게 나를 성장시키는 발판이다. 나의 좁은 이해의 폭을 넓혀가기도 하고, 그래서 타인을 감싸안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위로받기도 하면서.

 

 

 

*

 

나는 태생부터 '드라마'를 내 삶에 들여놓는 걸 좀 끔찍해했던 것 같다. 이유는 단 하나. 귀찮아서. 아니, 리얼에서 충분히 괴상하고 이해안되는 종자들과 뒤섞이는 것도 충분히 힘든데 굳이 고요한 휴식시간까지 타인의 드라마로 채워야하나? 늦은 시각, 라디오로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낄낄대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극적인 소재로 가득한 TV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건 더 이해할 수 없었고. 영화를 무척 좋아하지만 굳이 다운받아서 볼 정도까지의 열정은 아니고, 아무튼 이렇게 타인의 드라마를 귀찮아하다보니 나는 늘 고인 우물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저 새끼는 왜 이러지? 에 대한 고민 자체를 삶에 들여놓지 않으니까, 일단 내 인생에 '저새끼'가 없고 타인의 행동에 대한 궁금증이 없으니 이해의 폭이 넓어질리도 없고, '저 새끼의 저런 행동을 딴 사람은 그냥 보고 있는데 왜 나만 지랄이지?' 라는 자기 성찰이 없으니 자기 성장도 없다. 쓰다보니 아, 드라마는 정말로 위대한 것이었구나. 빼빼로삐로뿅~ ♥

 

그런데 최근에 알게된 사실인데, 쪽팔리지만 볼 사람 별로 없으니 여기 밝히자면 나는 '애정결핍'이란다. 오 마이갓.

진짜 최근, 그러니까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사실이다. 그리고 믿을만한 사람이 말한거니까 진짜 믿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나는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쏟는만큼 관심과 사랑을 못 받을까봐서 애초부터 타인을 멀리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는데, 이걸 또 한번만 비틀면 '나에게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는 안심하고 얼마든지 관심과 사랑을 쏟을게요' 라는 논리가 도출된다. 미친게 아니고서야 무작정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겠는가. 아무튼 받는만큼 돌려주겠다는 알량한 태도는, 이제 나도 좀 어른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언젠가는 그만두어야겠지.

 

유치해보여도, 시간 죽이는 것처럼만 보여도, 도무지 똑같은 얘기를 왜 하염없이 되풀이 하는 건지 짜증이 치밀어도, 기타치러 왔으면서 왜 허구한날 기타는 안치고 술잔만 부딪치고 있는지 화가 솟구쳐도, 이 모든 것에 줄곧 돌려온 등을 이제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드라마로 풍덩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억지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서서히, 서서히. 

 

 

 

* 어찌됐든 여유있는 주말 밤에 약간은 몽롱한 머리로 글을 쓰고 있으면, 어느정도 내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 좋다. 내 생각들이 휘발되지 않고 보기좋게 정리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