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지 일년하고 두 달이 지났다. 힘들고 외로워 부던히 손가락을 꼽아보며 '오늘이 몇 달째지' 하던 날들도 있었는데- 아 옆방에 미친년, 또 떠든다 증말. 너 지금 몇시니- 일년을 넘기면서는 손가락을 꼽아보던 그 버릇이 자연히 없어졌다. 어찌됐든 1년은 지났다는거니까. 버텨냈다는거니까.
문득 서울로 가겠다고 했을 때, 내 자신은 정말 '익숙한 이 풍경을 벗어나고 싶다'라는 단순명료한 이유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1초만에 결정을 내린 것인데, 빤한 주위의 시선들은 역시나 조금은 빤했다. 서울에 새로 잡은 직장이 벌이가 더 괜찮아서, 내 꿈을 품어줄만한 원대한 회사라서, 역시 사람은 어찌됐건 서울에서 살아야해서, 서울 남자 잡아서 시집을 잘가려나 등등. 아무런 이유도 없는 너무나 단순명료한 행동들은, 어쩌면 너무나 담백해서 사람들은 거기에 많은 이유를 갖다붙여 조금은 기름지게 만들고 싶은가보다. 기름기가 많은 것들이 더 맛있는 법이니까. (갑자기 고등학교 때, 허리 조금 덜 오던 새까만 흑발을 남자애처럼 확 밀어버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날더러 많은 아이들이 '지현이 공부하려고 맘 잡았다'고 수근거렸는데, 어이가 없었던 것이 나는 이미 충분히 공부를 잘하고 있는 모범생이었고 뭔가 마음을 다 잡아야 할 정도로 행동거지에 어긋남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내가 그때 그 아름답던 흑발을 싹둑 잘라버린 이유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조금 잘랐는데 돈을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러서 그 자리에서 '죄송한데 다 밀어주세요'라고 한 것이 다다.)
아무튼 나의 담백한 서울 상경은, 새로 잡은 직장이 직원 너 댓의 작은 출판사인데 벌이가 괜찮아봤자 얼마나 괜찮겠으며 예상은 충분히 했지만 방세를 내느라 허덕이고 있고, 내가 이렇다 할 꿈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사람이 서울에서 살아야할 이유를 잘은 모르겠고, 오히려 많은 친구와 살 부대끼는 가족을 뒤로하고 철저하게 외롭고 궁상맞은 삶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시집은 내 인생의 중요한 화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패스.
'지겨워서'라는 98%의 이유때문에 서울에 왔지만, 굳이 나머지 2%를 찾으라면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어떤 공부인지는 좀 비밀이다. 작년 이맘 때 한 달정도, 그리고 새해 맞고 나서 한 달 정도 드문드문 했던 적은 있는데 그 뒤로 쭉 쉬었으니 이건 뭐 사실 한 셈도 아니지.
아무튼 내 마음 속에는 이 공부라는 것이 나중엔 의무감 비슷한 무게로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는데, 점점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공부를 계속 해 나가고 싶은 내 마음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난 해야해. 하지 않으면 안 돼. 해야 되는데. 언제 하지. 언제. 언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스스로가 던지는 돌멩이의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해야하나... 상황이 갖춰지면, 내 경제적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히 생기면, 그 때 자연스럽게 하자고. 결심한 것이 1년전인데. 1년전에도 '충분히 늦었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충분히 늦은데다가 1년 더 추가'가 되었으니, 나의 스트레스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들이지 말자고 - 충분히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인줄은 알지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의 어느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내가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고 안아줄 수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아무 것도 내 인생에 들일 수도 없을 것이고 들이지도 말자고. 원래 마음 쉬 여는 타입이 아니니 쳐내는건 잘 하는데, 전제조건은 어디로 간건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모든 것을 쳐내고만 있다. 내가 왜 나를 더 이해한 뒤에 타인을 받아들이자고 애초에 약속했었나. 부대끼며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 관계들이 충분히 무섭고 지겨웠고, 자신의 감정을 본격적으로 나에게 의탁하는 그 존재들이 끔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충분히 건강하지 않아서 그런 감정들을 받아줄 수 없는데, 충분히 건강하지 않은 이들이 충분히 건강하지 않은 감정들을 자꾸만 나에게 발설할 때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주변에는 그런 이들이 꼬였고, 다른 이들 앞에서는 건강한 이들이 내 앞에서는 병자가 되기도 했는데 - 보통 '사랑'이라는 감정을 앞세워서- 나는 그래서 늘 도망쳤다. 그런 사람들만 피해서 도망가면 될 꺼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자였다. 마음 속에 상처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어쩌면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조그만 생채기도 못 보고 눈을 질끈 감는 사람일수도 있다. ...사람이다. 이 세상 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 상처도 좀 보여주고 남의 상처도 좀 돌봐주고 하면서 살려고, 결과적으로는 그래 당신들이랑 좀 더 잘 부대껴보려고, 좀 덜 외로우려고 나는 나를 먼저 치료해야겠어. 돌봐야겠어.
뭐 읽다보니 역시나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고 옆방년은 아직도 떠든다. 아무튼... 난 정말 잘 해보고 싶다. 1년만이라도. 1년이 너무 무섭고 두렵고 힘겨우면 6개월, 아니 3개월만이라도. 그래 백일 만이라도. 백일 동안 이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움틀때쯤이면, 이 글을 다시 켜놓고 모니터 앞에서 엎드리고 수그려 펑펑 눈물을 찔찔 짜냈으면 좋겠다. 참 잘 낸 용기였다고. 내 자신에게 기회를 줘서 참 고맙다고. 참 잘 한 일이었다고. 내가 용기를 오롯이 쥐어짜낼 겨울. 너무 두려워 그 좋아하는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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