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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0년 10월 18일 : 이해

새벽 네시 삼십분에 일어났다. 가만히 누워있었다. 마음이 쌔-하다.



지난 금요일, 내 밑의 후임이 실수를 했다. 분을 못삭이고 동동거리고 있으니 승희가 한마디 한다.

-그냥 잊어버려.
-아 몰라. 난 왜 용서가 안되지?
-이해하려고 해봐. 그 사람 입장을.
-이해? 왜 내가 이해를 해야되는데! 나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해를 하면 다 용서가 돼.
-뭐 어떻게? 그럼 이놈의 회사는 왜이런건데.
-돈벌려고 그러는거 아냐.
-그럼 누구는 왜 그런건데? 그럼 뭐는 왜그런건데? 그럼 뭐는 왜그런건데? 응?응?

나는 늘 그랬다. 지독하게 좋은 기억력때문에 10년전 처음만난 친구의 옷차림은 물론, 누구와 몇년전 어느 식당에서 어떤 메뉴를 먹었던지도 기억이 난다. 물론 내가 살아왔던 모든 365일들의 24시간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의 가공할만한 기억력은 많은 추억도 안겨주었지만 많은 분노와 미움도 그때 그대로의 신선한 상태로-오히려 더더욱 선명한 색채를 띠었을지도 모른다-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너는 그때 나한테 안 그랬니?' '넌 그때도 그래놓고 지금도 똑같이 이래!' '니가 나한테 그랬으니까 내가 지금 이러는거 아냐!' 상대방의, 어쩌면 사소하다 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서도 나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혹여나 그 당시에는 괜찮은 척 넘어가더라도, 나의 가공할만한 기억력이 너의 실수들을 차곡차곡 담아놓고 있기때문에 언젠가는 그 서랍들을 헤집어 탈탈 털면서 온갖 분노를 터트리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기어코 너의 실수를 짚고 넘어가, 내가 받은 상처를 돌려주고 말겠어!' 라는 이 뒤틀린 보상심리는 상대는 물론, 나도 다치게 했다. 잘 알고 있었다. 칼날밖에 없는 칼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칼날을 들이밀지만, 나 역시 칼날을 쥐고 있다는 걸. 다만 내가 받은만큼 돌려주겠다는 심리가 너무 커서 내 손에 쥐고 있는게 칼자루인지 칼날인지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손에 쥐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면서도 말야.

샤프심. 내가 왜 그토록 첨예한 날을 들이밀 수 밖에 없었는지, 무던히 넘어갈법도 한 상황속에서 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기어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는지. 나도 최근에야 어렴풋이 그 이유를 가늠해보게 되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어났던 사실이 바뀌는건 아니니까.

아침. 유난히도 느린 버스의 속도때문에 운전기사아저씨와 그 바로위에 장착되어있는 전자시계숫자를 번갈아가며 노려보던 나는 곧 짜증이 치밀고 만다. 평소의 1.5배 이상으로 시간이 걸리니, 난 곧 지각하고 말것이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놓고 지각이라니. 이것 참. 그때 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이해하려고 해봐' 이해? 이렇게 느려터졌는데 이해는 무슨, 초짜 아냐? 툴툴. 아저씨를 가만히 살펴본다. 가만보니 연신 인상을 쓰고 있는것이 혹여나 어디가 아플수도 있고, 정말로 운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서 잔뜩 긴장한 채일수도 있다. 그래 그럴수도 있다. 나의 옹졸한 마음이 아주 조금, 정말 물 한방울 만큼은 누그러 들었다. 이해하려고 해봐.

일전에 누군가 나에게 심리테스트 문제를 내었다. '일어나니까 사방이 꽉 막힌 방이야. 넌 어떡할꺼같애?' '음. 그냥 누워있을꺼 같은데' 난 굳이 그방에서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대답을 듣고 그는 말했다. '사방히 꽉 막힌 방이라는게, 문제상황을 뜻하는건데...보통 사람들은 문을 부수고 나간다던가, 탈출구를 찾아본다거나 그러거든. 넌 되게 소극적인거 같다.' 문제상황에 처했다는게 그렇게 꼭 나쁜건가? 어쩌면 문제상황이 나에게 주는 고통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래. 난 이렇게 당해도 싸. 난 좀 더 많이 아파야돼. 좀 더 많이 무너져봐야해. 하면서.

아무것도 할수없을때-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기 귀찮을때-쓰는 최후의 수단. 모든걸 잊고 잠들기. 일요일에도, 베로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아마 저녁 7시까지 잠을 잤을테다. 잠을 자고 자고 또 자서, 더이상 잘 양이 남아있지 않아 오늘 새벽 네시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난 또 다시 잠을 청한다. 마음이 쌔하다는 비겁한 이유로. 역으로 드어오는 지하철. 성냥처럼 나란히 앉아 조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아 이 지긋한 풍경. 이제 한달만 있으면 끝이군!' 야릇한 쾌재를 불러보지만, 어차피 이 지긋한 풍경은 장소만 달리해 반복될 꺼라는 생각이 곧바로 나를 따라온다.

비슷한 시기에 얻었던 소중한 두가지를, 비슷한 시기에 잃었다. 그게 다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다루지 못해서 잃게되었다. 그게 다다.

얻었던 것을 잃었으므로 나에게는 다시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좀 더 나은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면 소중한 것은 소중히 다룰줄 알아야 한다는 진부한 교훈을 하나 얻었을까. 멍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