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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내가 얼마나 여전한 인간인지

한가위다. 나와 동갑내기 남자아이의 '한가의 잘보내렴' 이라는 문자에 피식. 밖에는 비가 철철내리다 좀전에 막 그치었고, TV에서는 명절마다 반복하는 천곡 노래자랑이나 내고장 탐방따위의 프로그램이 나온다. 의문이다. 정말 재미없는 저런 프로그램들이 명절마다 꾸준히 방영되고 있으니. 과연 인기가 있는 모양이기도 한가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나의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어제 잔뜩 어지럽혀놓은 방을 치워야지. 어제는 오랜만에 잔뜩 어지럽혔거든. 카라멜을 있는대로 다 까먹고 마른 빨래를 개키지도 않고 어지러이 쌓아놓았다. 머리카락도 한몫했을터. 

나의 방은 다락으로 통한다. 방 한켠에는 나무로 된 문이 하나 있고, 문을 열면 하늘로 향하는 간이 계단-계단이라고 하기에도 머쓱한-이 있다. 집안의 움푹진 곳에 자리한데다가 방안에 다락까지 딸려있고, 게다가 그 안에 칩거하는 인간은 밝고 쾌할한 이 집안 구성원의 면모를 띠고 있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그들과는 다른데가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가끔 거실밖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음악소리의 정체를 어머니에게 묻곤 하셨다. '현이방 음악소리잖아' '쟈는 저 안에서 머하노?' 내 배로 낳은 자식새끼가, 내 돈으로 벌어 장만한 내 집안에서 도대체 어떤 세계를 구축하며 사는지 아버지는 몹시도 궁금하셨을터. (내 방은 항상 잠겨있다. 지금도.)

내 방에는 항상 음악이 흐른다. 밥은 굶어도 책은 사야하는-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책을 사재는 걸 좋아한다- 인간이기에 여기저기 책이 빼곡하고, 사소한 몇가지를 차곡차곡 수집해왔기에 공간의 여기저기에 자그마한 피규어와 타국의 기념품 따위들이 놓여있다. 다락에는 나의 유년시절 일기들과 여행의 흔적들 등을 종이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그도 관리를 허술하게해서인지 이것저것이 마구 섞여있다. 

다락을 올라가는 계단에는 까슬까슬한 횟가루가 수북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회벽이 벗겨져 내리면서다. 처음에는 계단에 수북한 횟가루를 보고 흠칫 놀라며 혹시 도둑이 든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목이 부러진 선풍기나 두번쓰고 처박아둔 족욕기나 피자팬 따위를 훔쳐가기 위해 엉덩이보다 좁은 창문을 비집을 수고는 하지 않을것 같다. 

다락에 올라가 지난 몇년간 쓴 노트들이 제자리에 잘 있나-제자리에 잘 없어서 한참을 찾았다- 살펴보다가, 2년전 런던여행에서 사다온 아름다운 그림엽서들이 관리허술로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걸 보고는 가슴아파하다가, 또 다른 상자에서 중국유학시절 샀던 발색이 더럽게도 안되는 색연필 한다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리는데 이런? 고개를 돌려 마주한 벽면에는 수능대박을 꿈꾸던 내가 있었다. 
수능 D-9라. 그렇다면 2003년 11월의 어느 날이겠다. 열아홉의 나는 다락벽에다가 '수능대박터주자'라는 말을 써넣으면서 무슨 심정이었을까. 수능대박터지기를 바랐던 열아홉의 나는, 수능당일날 대박대신 심장이 터질뻔했다. 답안지에 이름을 써넣을때부터 손이 달달떨려 왼손으로 지탱하고 써야했거든. 

영국여행에서 산 많은 장난감들중에 나는 싸이언스 박물관에서 산 온도계 겸 나침반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탱탱볼, 암석조각, 아름다운 그림엽서들-은 다시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다음번 찾을때도 그 자리에 고이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내 나이 스물다섯. 오늘아침 열아홉의 흔적들을 마주하고 보니 까마득하다. 7년.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지? 그리고 앞으로의 7년은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어디로 가야할진 꿈에도 몰라도, 7년은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컵라면 기다리는 3분'만큼이나 지루하고 또 빠르게 흘러갈것이다. 7년이 깜빡흐르고 나면 나는 또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으리라.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지? 그리고 앞으로의 7년은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나는 바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침반이라도 지니고 살아야겠다. 나는 살면서 길을 많이도 잃고 헤매기도 많이 헤매일 것이다. 그러니 나침반으로 위로를 삼아야겠다. '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북쪽은 알고 있어!' 하는 위로를 하며 스스로를 꾹꾹 눌러 다독일 것이다. 옆에 딸린 온도계를 살그머니 체크하면서. 음. 내 마음의 온도는 여전히 36.5 도 구만! 이정도면 괜찮구만! 따뜻한 인간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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