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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말을 건 그 다음은,

오랜만에 빨간책을 펼쳐들었다. 사전적으로 빨간책이니 오해는 말길. 겉표지가 아주 근사하다. 상징적 빨간책의 의미도 갖고있긴 하지만 밝고 경쾌한 빨강이라 감히 '빨강'의 범주에 끼우기도 머쓱한 귀여운 빨강.

사실 이 작가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뭐 고상한 인격이라고, 나는 귀여운 빨강의 냄새조차 경멸하며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을 샀던 이유는 양지바른 빨강의 냄새가 너무 매혹적이었거든. 그리고 작가의 깊이있는 사고와 센스. 그래. 그냥 나도 빨강이 좋았던거야. 고상한척 해서 미안해-어젯밤 무렵부터 몹시 읽고 싶어서 오늘은 결국 책상자를 다 뒤집어서 찾아냈다. 오. 내 안에 존재하던 거부감과 경멸은 어디가고 호감과 찬탄마저 끓어오르는 걸 보면 나도 꽤 많이 변했나보군. 좋은 의미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거야.
 
그런 다음, Talk to her. 그녀에게 말 걸어야지.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걸 감사하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여기. 유전적 성향에 의해 화성남자 금성여자가 태어날때부터 결정지워지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성별이 성격을 만들어가는 부분도 무시할수 없지 않겠나. 수업시간에 마음에 든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 고민하던 녀석이 생각나고, 그 여자가 전화번호 줄지 안줄지 전전긍긍하던 남동생이 생각나고, 그녀앞에서 한숨만 내쉬며 눈을 굴리고 있을 이름모를 청년들이 생각난다. 아 정말 남자는. 어떡해야하지? '내가 남자라면...' 이라는 문장을 머릿속에 담는것만으로도 가슴이 이렇게나 답답해지다니. 나와 같은 성향의 남자들도 분명히 있을거잖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들.

대학동기중에 간혹 인사만 하고 지내던 여자(학생이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여자였다)가 있었는데,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수업에서 누구의 번호를 땄다'는 이야기를 주로 했던것 같다. 그녀의 논지는 '남자들은 애인이 있어도 열이면 열, 다 번호를 준다'는 것. 진한 화장, 늘씬한 몸매, 달라붙는 치마. 성공률 일백프로를 자랑하는 그녀의 스펙.

난 죽었다 깨어나도 말붙일 용기가 없으니, 남자들이 '말을 붙여주는 성별'로 태어난게 여간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정말 남자였다면 섹시한 스펙의 그녀들이 말을 붙여주길 기다리거나, 혹은 평생 여자손 한번 못잡아 본 남자가 되겠지. 혹여나 참기름 짜내듯이 쥐어짜고 쥐어짜낸 한방울의 용기로 그녀에게 '저기요' 하고 말을 걸었다치자. 그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하지? '초면에 실례하지만 사랑합니다!' 응? 정말 울고싶을 정도로 답답해지는군. 처음본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 + 유려한 말솜씨 + 여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여러 화제를 조리있게 넘나드는 박학다식함 + 재수없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간간히 곁들이는 유머 + 값싼남자로 비춰지지 않을만한 품위있는 분위기 + a + b + c + d ...으악!

남자는 섹시한 스펙이면 땡일지 몰라도, 여자들은 너무 복잡한 종족인 것 같다. 내동생은 오늘도 그 복잡한 종족들과의 접촉을 위하여, 눈부시게 다린 하얀셔츠에 적당히 붙는 진. 실용적이면서도 귀여운 디자인으로 자신을 센스있는 남자로 만들어줄 까만색 백팩-니가 지금 주드로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냐-.적당한 왁스와 스프레이로 빚어낸 '여자들이 좋아하는 머리(집을 나서기 전에 꼭 물어본다. 이 머리 여자들이 좋아할까?)'를 하고서는 거울이 깨질듯이 노려보며 나간다. 나간다고 말하고는 다시 들어와서 거울을 몇번이나 들여다보며 나갔다가 또다시 스프레이를 뿌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또다시 들어와서는 거울이 깨질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거울만 들여다보고있다. 그리고는 셀카를 찍는다. '멍멍'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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