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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當五外語 - 한사람당 외국어를 다섯개씩 배우자!

아. 언어로 지어진 것은 언어를 파괴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문득든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말하고 씌여진 것은 한국어로 알아듣고, 영어로 지어진 것은 또 영어로 듣고 읽고, 중국어는 또 중국어대로. 화란어는 또 화란어대로! 소위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이야기해내는 통역이나 번역에 수반되는 행위는 파괴인데, 그 파괴한 더미속에서 다시 그것들을 새롭게 지어내는 일을 통역가나 번역가가 해내고 있다. 즉, 사상의 파괴와 재창조를 이들의 손에 맡겨두고 있는데 문제는 이들의 책임의식이 과연 어느정도인가 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접하게되는 이는 번역가이기때문에 번역가만 논하기로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번역가분들도 여럿있다.) 일반대중이 책임의식을 운운하기에 앞서, 이들이 이렇게밖에 해낼수없는 여타 사회구조부터 한번 꼬집어봐야겠지만. 아무튼 어디서부터 손대야될지가 막막하기 이를데없다. (내가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꿈있는 젊은이도 아니고. 설사 출판업계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힘으로 뭘 어떻게 해보겠는가.) 번역가는 질낮은 급료와 출판사의 독촉으로 인해 조악한 번역을 해내고, 대중들은 그런 조악한 문학을 읽고 조악한 생각을 해내고 조악한 행위를 하고. 조악한 문학으로 인해 생성된 조악한 대중들사이에서 다시 조악한 번역가가 태어나고. 위대한 사상이 전하고자 한 바는 본데없이 사라지고. 번역이 다소 질낮다한들 상황을 너무 확대해석한것 아닌가하는 반문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한 물건이 한 문화 자체를 파괴한 사례가 역사에는 무수히 많다. 단지 한 물건이 한 문화 자체를 붕괴해버리는 괴력을 갖고 있을진대, 하물며 사상은 오죽하겠는가. 또한 형체가 없는 이러한 것들은 '언어'라는 틀을 빌려 운신할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이 언어를 다루는 자들과 대하는 자들이 너무나 불경하다.

나도 국어가 짧고, 영어가 짧고, 또 다른 외국어도 간신히 몇마디 하는 수준이지만 이 수준에서도 번역은 너무나 문제가 많다. 이런 문제들은 차치하고서 언어의 미학에 대해서만 따져볼때라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언어의 파괴를 일삼고 있다. 국어가 아닌 말들. 즉 외국어는 죄다 국어로 바꿔 이해할수밖에 없는것이다. 일반적인 명사나 그 개념자체가 산업화에 기반을 두고있는 것들은 국어로 바꿔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지만, 그 나머지 무수한 것들은 어쩔것인가. 일단 파괴되면 본연으로 되돌리기 어렵다. 번역이라는 과정에는 필히 파괴가 수반될진대, 언어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그냥 그 언어를 가슴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영아시절에 외쿡에서 수돗물을 먹지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방바닥을 칠뻔했다. 한쪽에서는, 어린시절 아이가 모국어적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타 외국어를 배우면 언어정체성에 혼란이 온다고 말하니 그것도 맞는 말이지 싶다. 내가 진짜 어려서 無의 상태로 세상에 왔는데, 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한명은 '사과', 한명은 '애플', 한명은 '핑구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게다가 한 사물에 국한된 것이면 괜찮을지몰라도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에 이름이 세개씩 있다면, 아기는 하루에 10가지사물을 본다고 해도 30가지 언어를 기억해야하는 셈. 흠. 영재가 되거나 미치거나 둘중에 하나겠다. 

아무튼 가장 가슴아픈것은, '외국어를 배워서 외국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라고 주장한들, '외국어를 배운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언어의 파괴행위가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엉엉. 바벨탑에 얽힌 하느님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와닿은 적이 없다. 옛날옛적에 인간들의 지식이 오만해져서 하느님에 대적하기 위해 바벨탑을 지었다, 노하신 하느님이 다시는 인간들이 사상규합을 못하도록 말을 다 따로쓰게 했다, 하느님 曰 : 너네 이제 어쩔?  참으로 명쾌한 형벌이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언어를 파괴하지않고서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할것이다. 이는 사상의 영원한 불완전성을 뜻한다. 미전세계가 하나의 언어로 그 미묘한 지적경계까지 마음껏 넘나들수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그리고 나도 그때의 인간이었다면, 바벨탑을 짓는데 적극 동참했지싶다. 지적오만이 구름을 뚫고 우주까지 뻗어나갔을것이므로.

* 빌려쓰는 말이 많다보니(한자 및 외래어) 언어에 낭만이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국어의 안타까운 점 중 하나이다. 영어에서는 rainforest, 중국어에서는 多雨林이라 한다. 듣는 즉시, 어린아이라도 바로 이해될뿐더러 낭만적이기까지한데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그대로 빌려 다우림 이라 한다. 한자지식이 없다면 무슨 말인지 알수없다. 왜냐하면 한자는 하나의 외국어이기때문에. 그런데 또 다우림을 모른다고하면, 우리나라말을 잘 안다고 할수가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말은 외국어가 그 구성요소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순 우리말'을 살리자 하는 외침이 있는것이지만, ('순 우리말'이라는 개념조차 웃기다. 순純 우리말이 있으면 불순 우리말도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줄곧 불순했단 말이된다.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불순성을 스스로 인정할수밖에 없는, 아아 불순한 민족이여! 에스페란토 어 처럼-세계 공용어. 영어에 실린 힘을 덜어내보려는 노력정도로 보인다. 물론 잘 안되고 있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한국어'를 지어내지 않는이상 순 한국어가 가능할까하는 의문.) 언어의 효율성이라는게 있기때문에 한자어를 포기하기가 쉽지않은 실정이다. 다우림을 계속 예로 들어보자. 다우림을 순 우리말로 고쳐부른다면 '비가 많이 내리는 숲'이 된다. 완전 낭만적이고 좋지만, 과연 다우림 보다 거의 세배가 긴 이러한 단어를 채택할 가능성은? 되도록 빨리,가능한 많은 정보를 실어나르는 이 효율성의 시대에, 언어가 反효율을 달릴 가능성은? 아마도 제로. 

중국과 같은 문자를 쓰면서 발음이 다른 이유는, (나의 잡지식이기에 믿고 안믿고는 자유) 언어의 시대성과 가변성에서 기인하는데 우리가 현재 쓰는 한자의 발음은 중국어의 고대 발음이라는 것이다. 아마 옛시대에 중국문물을 받아들일때 언어도 함께 넘어왔거나 뭐 어쨌거나 했겠지만, 중국인들은 한자언어(생활을 위해서는 한자를 '소리내어 읽어내야'하므로)를 계속 쓰고 있기때문에 그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또 지역에 따라 변했지만(지금도 지방색이 워낙 강해 중국인들끼리 한 글자를 두고 몇십가지로 읽어내지 않는가.) 우리는 한자라는 것이 유입될때, 그것이 소위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은 한자를 '소리내어 읽을 필요가 없었기'때문에, 즉 입말口語와 글말文語이 달랐기때문에 한자가 우리나라에 유입될때 그대로 고착될 수 밖에 없지않았나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쓰이는 한자가, 중국인들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이런 한자를 '고대한자'라고 칭하며 옥편을 뒤적거려 겨우 그 의미를 알아내곤 하는데 내 이름의 한글자도 '고대한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들의 옛날말을 빌려쓰고 있으니, 이건 뭐 내꺼라고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니꺼라고 할수도 없지만 니꺼에 가까운 그런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옹졸한 심사는 아무쪼록 '과거'라는거에 집착 연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말은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겠다. 현재 통용되는 우리나라말이 외국어인지 외래어인지도 모르겠다. 세종대왕님하와 진지하게 면담한번 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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