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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두운 의자 안에서

<캐롤>_당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한순간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는 때가 있다. 멋드러진 분위기의 포스터와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 라고 쓰인 간결한 문구가 내 마음을 콱 사로잡아서 꽤 오래 벼르다가 생일선물로 받은 영화티켓으로 을 보러 다녀왔다.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 누군가는 언젠가 나에게 '살면서 정말로 첫눈에 반하는게 있어?' 라고 묻기도 했는데,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그 친구가 좀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더랬다. 그 한 사람이 주위의 풍경을, 소리를, 색채를 다 잡아먹고 순식간에 그 사람에게 빨려들어가는 그 강렬한 순간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대학시절 꽤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데, 좋지 않은 시력에도 다들 고개를 처박고 공부하는 그 넓은 도서관에서 그 사람 뒷통수를 단박에 찾아낼 정도였으니까.

여주인공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영화 초반부, 차창 안의 테레즈를 보면서 '아 사람이 어쩜 저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별처럼 반짝거릴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닌 모양인지 캐롤도 테레즈에게 그런 말을 한다. '참 신기한 사람.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캐롤은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또 이름처럼 너무나 근사하고 매혹적인 크리스마스 캐롤같은 사람이다. 우아하고 기품있고 화려하고. 캐롤이 테레즈와 재회한 테이블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순간 그 눈빛에 눌려서 아득해졌다. 저 눈빛이라니. 저 눈빛이라니. 그리고 1초 뒤에 캐롤의 입에서 '아이 러브 유' 라는 고백이 나지막히 걸어나온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로 이미 눈빛이 너무나 진짜였기 때문이다. 물건너 제 3자 어느 아시아 관객하나가, 발렌타인데이 특집으로 커플과 커플 사이에 홀로 끼어있다가 그 눈빛의 깊이에 눌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으니까. 영화 <무뢰한>의 눈빛들이 겹쳐진다.

나는 내가 동성애에 어느 정도로 열려있는지 잘 모른다. 책이나 영상으로는 아무 잣대없이 끄덕거리더라도, 주변의 친구 하나가 본인이 양성애자라며 고백해왔을 때는 짐짓 마음이 움찔거린게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깊게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중간에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끌리게 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다' 라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끌리고 누군가는 싫어하게 되는데 그건 물리학 같은거라고.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끌리냐 끌리지 않느냐' 뿐이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내 생일을 기점으로 마음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렸는데 - 아마 살면서 처음으로! - 내가 무턱대고 끌린다고 해서 나와 같기를 요구할순 없는 노릇이겠지. 갖고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가진다고해서 언제까지고 오래오래 지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본디 사랑이란 것이.

눈송이처럼 손에 닿으면 사라질까 두렵지만, 그러니까 반짝일때 꼭 움켜쥐고 싶다. 내 시간과 소리와 색깔을 다 잡아먹고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주춤거리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고 그 눈빛을 오롯이 맞받아 낼 수 있는, 사랑 앞에 용감한 사람이면 좋겠다. 반짝이다 녹아 사라져도 씩씩하게 끝까지 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마음에 순진한게 바보 멍청이 같아도, 나는 끝까지 용감하게 내 마음에 순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참 좋겠다.


(*)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첫눈에 봤어도 사랑했을거예요. 당신도 나중에 사랑 앞에 용감해진다면 그 때 내 손을 잡아주세요. 캐롤처럼 나타나서. 혹여나 나타나지 않는대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원망하지 않는 연습을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