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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두운 의자 안에서

<소셜포비아>와 <위로공단>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생계. 묵직한 이 한 단어를 발음해본다. 생계는 '살아갈 방도' 라는 뜻으로 날 생生에 셈할 계計를 쓰지만, 그 자리에 이을 계系를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생계. 생을 어떻게 잇고 이어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줄을 잡고 이 생에 매달릴 것인가. 매달려야만 하는가.

 

연이어서 본 <소셜포비아>와 <위로공단>을 묘하게 관통하는 메세지 앞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진즉에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시대를 산다. 먹고 사느라 바빠 남의 고통은 고사하고 나의 고통조차 들여다 볼 여유도 아량도 없다. 들여다보면 너무 아픈 상처뿐이니까. 무덤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클릭 몇 번으로 장바구니에 물건을 쓸어담고, 오늘 하루도 바쁘게 무사히 지나가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타인의 고통에 반짝 관심을 보일때도 있다. 유명 아이돌의 스캔들, 재벌의 돈세탁, 연예인의 군대비리... 충격! 공포! 소름! 한층 더 자극적이고 원색적으로 가공되고 부풀려진 타인의 고통에 우리는 잠시나마 현실을, 나의 상처를 잊는다.

 

<소셜포비아>에서 한 소녀가 자살을 한다. 그 소녀의 자살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추론이 이어지는데, 어느 누구하나 그 소녀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없다. 소녀의 죽음은 가십이고 뉴스다. 마네킹으로 소녀의 자살을 재연하는 무리들은 환히 웃으며 낄낄거린다. 왜 죽었을까, 가 아니라 누가 죽였을까, 에 바쁘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또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희화화한다. 타인의 고통이야 어쨌건 나만 아니면 되니까, 너무 재밌고 즐겁고 소름돋고 충격이고 공포고 소름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이어나가야만 하는, 그러기엔 너무나 팍팍하고 버거운 이 먹이사슬에 대한 무력한 분노가 이름모를 타인에게 무작위로 배설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이 먹이사슬을 버텨야하니까. 이겨나가야만 하니까.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니까. 미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밟을 수 없을테니까.

 

소녀의 죽음에 대해 '왜'를 묻지 않는 사회의 냉랭한 시선은 <위로공단>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Respect Labor Right!' 우리 사회의 무수한 노동자들은 과거에도, 오늘도 소리높여 부르짖는다.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왜' 를 묻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감히 소리를 지르느냐고, 눈물을 흘리느냐고 윽박지르기고 색출해내 입을 틀어막기에 바쁘다.

 

그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가. '생계'라는 두 글자가 버겁기 때문이다. 이 삶을 잇기가 버거워 눈물을 흘린다. 캄보디아에서는 대기업의 생산직으로 일하다 한달 월급을 160달러(한화 약 19만원)로 올려달라는 시위에 가담한 청년이 총살을 당했다. 캄보디아의 일만이 아니다. 매순간 벌어지는 매일의 총살. 다산 콜센터의 여직원 하나는 눈물을 흘리며 '옛날에는 공순이가 있었다면 오늘은 콜순이가 있다'고 말끝을 흐린다. '1초만 까딱하면 장바구니가 집으로' 라는 간결하고 편리한 문구 뒤에는, 정해진 시간 내에 당신이 주문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쓸어담지 않으면 생계가 보장이 되지않아 1분 1초가 아까워 동동거리는 누군가가 있다. 온갖 아름다운 상품들이 진열되어있는 아름답고 널찍한 쇼핑센터에는 물건을 진열할 자리는 차고 넘치지만, 직원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지난 여름, 회사에 은행직원이 통장개설을 목적으로 찾아왔었다. 사람들을 불러놓고 온갖 영리한 제테크 방법에 대해 떠들던 그는, 바깥에 지나가던 폐지줍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지금 열심히 벌지 않고 저축 안하면 노년에 저렇게 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이 덜컥 걸렸다. 그 말이 덜컥 걸렸는데 뱉어내지를 못해서, 줄곧 내 안에 걸려있다. 당신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냐고, 새파랗게 젊고 젊어서 감히 누군가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느냐고, 삶에 경중이 있느냐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 다들 바쁘다. 바쁘고 먹고 살기 힘들다. 이 놈의 사회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래, 효율. 효율은 기계에만 덧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느새 효율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죄가 되어 버린 시대라는 것도 안다. 바쁘고 먹고 살기 힘드니까 최대한 효율적으로 덜 바쁘고 덜 고생하려고 아등바등 사는 것도 맞다.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왜 내가 알아야 할까?

당신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람만이 치유할 수 있다.

 

당신이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고통에도 결국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생은 각개전투니까 각자의 상처는 각자 끌어안고

알아서 뚜벅뚜벅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다시 한번 묻는다.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서로가 서로를 보듬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