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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11월 8일 : 사소한 일요일

 

△ 내가 미국인이었으면 이케아를 고소했을테다. 아 물론 요즘은 한국에서도 고소가 트렌드긴 하지.

 

 

 

 

* 중2병

 

 

어젯밤 자정 무렵에, 전 직장에서 잠깐 같이 일했던 남자분에게 연락이 왔다. 요 근래 자정즈음이 되면 나의 인기도가 폭발했다가 그 다음날 날이 밝음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런 연락은 왠만하면 피하고 있다. 그러다가 오늘 오전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결국엔 술을 한 잔 하자는 내용에 다름 아니어서 '다음에 뵈어요' 라고 내심 다음이란 말 안에 한 100년 정도를 심어놨다. 늘 부정적인 사람이어서 생각만으로도 찝찝했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 여파인지, 와장장 유리를 깨먹고는 오늘 몇 번이나 피를 봤다. 그 분과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멀끔하게 잘 생긴 얼굴에 아름다운 아내에 - 사실 이 두가지 중 하나만 거머쥐기도 상당히 벅찬것 아닌가 - 뭐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분이었는데, 늘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얼굴을 처박고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사실 연락을 피할까 했지만,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뭔 하소연을 하고 싶을까해서 받았다.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랬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요즘의 척박함을 토로하면서 자기를 잊지 않아줘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 모든 이에게 다 잊히고 겨우 전 직장동료의 알량한 기억이라도 뒤흔들어보는 고루한 고군본투 중일수도 있겠지. 전적으로 나의 실수겠지만, 이렇게 근 1년만에 온 연락에 유리가 손발에 쩍쩍 박히는걸 보면 역시 멀리하고 싶다.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면서, 오늘은 비오는 일요일이기도 하니 중2병같은 생각을 했다. 사랑은 유리같은 거라고. (여기서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못참는 분은 오늘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비가 하루종일 오는데다 일요일이니까.) 깨지기 쉬워서 조심조심 다뤄야된다기 보다는 깨진 후에 조각들이 어디로 튈지 감당이 안되니까, 대관절 언제 어디에 숨어있다가 다시금 나를 푹 찌르면서 아프게 할지 모르는 감정같은거라는 생각에 젖어있다가 유리조각에 손가락을 찔리고 피를 보며 중2병을 졸업했다.

 

 

 

* 내 남자의 귀여움

 

 

자고 일어났는데 친구가 전화가 왔다. 썸남과의 트러블에 대한 이야기를 죽 늘어놓는데 결국 들어보니 '내 남자의 귀여움'에 대한 자랑이었다. 17시 영화를 예매해놓고 오후 7시에 가는 서른 다섯이 어디있냐고 웃기에, 속으로 난 그 짓을 평생해와서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음을 말해줄까말까 했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충은 알겄지. 17시 따위는 없애야한다. 그 남자가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귀여움은 하찮을 뿐. 초코송이의 초코만 발라먹고 몸통만 보여줘도 그게 몸통임을 알아채는 남자 정도는 되야 이 시대의 진정한 귀여우니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아니면 여자에게 '임마, 된장'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문장 안에 녹여서 뱉을 줄 안다거나. 물론 후자는 왠만한 유대 없이는 관계 악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으니, 보통 남자 여자 관계라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 맹꽁력

 

 

도대체 TV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는 - 집에서 컴퓨터를 켜는걸 싫어한다. 주말출근까지 치면 일주일에 6일을 그놈의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데 집에서까지 바라보란 말이냐 - 집에서 심심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심심하다. 난 그 심심한 상태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데 대부분 좋다. 난 집에만 오면 맹꽁이가 된다. 찬장에 수북하게 쌓아둔 온갖 간식들을 꺼내서 쉴 새없이 까먹고 배를 두드리며, 이마를 까고 안경을 쓰고 주말엔 세수도 안하고 - 매일 하는 세수, 주말에 왜 해? 가 나의 지론인데 -  누웠다가 앉았다가 뒹굴거린다. 원래 허리가 좋지 않아서 어릴 때 빼고는 침대를 쭉 안 썼는데, 이사오며 한바탕 아줌마랑 싸우다가 침대를 새걸로 놔준다는 조건에 계약서에 싸인을 했는데 왠 걸, 썩 비싸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 침대가 좀 맘에 든다. 잠이 잘 와. (물론 바닥에서도 잘 잤지, 그래 알어.) 집에서의 맹꽁이는 하루종일 잠옷만 입고 있으며, 요리책을 좀 들여다보면서 침을 질질 흘린다. 오늘 먹은 것도 아마 성인 남자 3인이 먹을 수 있는 양이지 않을까. 도대체 나의 위는 블랙홀과 연결이 되어 있는건가. 고도비만으로 치닫지 않는 건 전적으로 내가 미혼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말의 가능성을 데리고 다녀야한다. 여성으로서의 기능성인지 가능성인지 모르겠다만. 미국에는 양동이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이 있던데, 내가 미국인이었으면 백퍼 150킬로쯤은 됐겠지.

 

 

 

* 삐뚤어짐

 

 

나는 원래 부모에 대한 화가 많다. 풀리지 않는 원망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걸 숨기기가 참 힘들어서 불쑥불쑥 나온다.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내 인생에 관여하려 들지마라.' 는 싹퉁 바가지같은 소리로 부모 속을 긁는게, 나란 인간이다. 지난 주말에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또 뭔가 엉키고 설켜서 얼른 도망와버렸는데, 그 뒤로 왠지 모르게 분노가 증폭해서 집에서 오는 모든 연락을 안 받거나 단답으로 해결하고 있다. 딱 한번 길게 답장한건 무슨 쇼핑몰 아이디와 비번을 묻는 질문이었다. 그런건 소중한거니까. 사실 이 비뚤어진 심기가 내내 풀리지 않아 11월의 시작과 함께 잘 해보려고 했던 모든 것을 다 놓고 있다. 영양가 있는 아침시간을 위한 계획도, 뭐 여유있는 저녁시간도, 몸에 안좋은걸 유독 많이 삼키는 요즘도 아마 그런 이유겠지. 안다. 안다. 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부모는 내가 심기가 뒤틀린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거다. 난 늘 혼자 예민한데서 은밀하게 날뛰고는 부모 앞에서 꾹꾹 누른다. 이 글을 쓰면서 화가 나서 생강맛 카라멜을 서른개째 까먹고 있다. 뒷면을 보니 1회 제공량이 두 개란다. 무슨 소리야.

 

 

 

* 부부력

 

 

부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시너지가 증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꽤나 큰 행운이다. 다림질을 못하는 아내와 다림질을 좋아하는 남편이 그야말로 기막힌 궁극의 조화아닐런가! (물론 내가 다림질이 하기 싫어서 이러는건 아니다. 다릴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다리미가 없다.) 그 뭐랄까. 아무튼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공유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건 - 물론 즐거움만 있는건 아니겠지만 - 정말 큰 축복이다. 마치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좋아할 수 있는 것과 맞먹는 기적같은 거랄까.

 

 

1.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

 

 

어제 조조로 <더 랍스터>를 봤다. '사랑에 관한 가장 기묘한 상상' 이라는 카피와 포스터가 멋드러지는 영화다. 어제 우산이 부서질 정도로 비가 퍼붓는 스산한 아침에 이런 영화 한 판을 붓고나니 기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해졌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남녀 사이의 미묘하고 섬세한 말랑말랑한 선만 극도로 건드린 영화라면, <더 랍스터>는 그 감정을 대놓고 지우개로 북북 거칠게 문질러 지우다못해 스케치북까지 다 찢어먹은 그런 영화다. 이 두 영화가 딱 극에 있다.

 

 

우리는 꼭 사랑을 해야하는가? 사랑할 권리, 사랑하지 않을 권리. 영화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조건은 '신체나 성격의 공톰점' 이다. 둘 다 코피를 잘 흘린다거나, 둘 다 시력이 낮다거나, 둘 다 폭력과 피를 좋아한다거나. 이 상황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진다. 주인공 남자는 근시 여인과 곧바로 사랑에 빠지는데, 근시 여인이 맹인이 되자 맹인이 된 그녀를 세워놓고 다그친다. 혈액형이 뭐야? 독일어를 할 줄 알아? 사라진 사랑의 감정을 다시금 불살라 보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공통점을 끼워맞추려 하지만, 도무지 되지 않자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맹인이 되려 한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 나와 취향이 잘 맞다거나 좋아하는 음악이 같다는 아주 사소한 한 가지 조각으로 사랑에 빠지고는, 모든 조각을 다 끼워맞춘다. 그래 맞아, 이 사람이야!

 

 

영화에는 사랑에 빠질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가 나온다. 두 사회 모두 규정을 어길시 상당한 처벌이 있다.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려고 억지로 노력을 하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억지로 노력하기도 한다. 억지 노력이란 전제답게 둘 다 실패한다. 주인공은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을 잃게되자  스스로 눈을 멀게해서라도 사랑에 빠지려는 행태를 보인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상태를 못 견디는 것이다. 그 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이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기에 끔찍하게 사랑 속에 머물고 싶어하는걸까. 인간이 죽을때까지 갈구할 수 밖에 없는건 결국 사랑일까.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그런데 사실 사랑의 갈구라던가 사랑의 바닥같은 걸 고민할 바엔, 열심히 사랑하는게 낫다. 인간은 평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이는게 낫단 말이다. 인간의 태생 자체가 남녀의 사랑아닌가.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2. 단단한

 

 

그러니까 사랑은 당연히 해야하는거고, 피하고 싶어도 하게 되는게 맞고, 하게끔 되있고 - 짝사랑이란 말이 괜히 나왔게 -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끝내 그 속을 살금살금 파보면 다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고. 아무튼 내가 사랑에 대해서 안온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같은거랄까.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사랑의 속성같은거 말고, 어차피 걔들은 사랑에 대한 불안을 팔아야 먹고 사는거니까. 불안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랑의 속성같은 것도 말고, 어차피 그들은 동족의식을 느끼고 싶고 남의 불행으로 자신의 덜 불행을 확인하고 위안받고 싶을 뿐. 나는 사랑의 단단한 속성이 좋고 좋은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혹은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그 감정을 가지고 이리저리 불안하게 널뛰고 싶지도 않고 그 감정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고 싶은 마음 같은 것.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고.

 

 

좋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결혼은 좋은 것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을 뜯어말린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단단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노력하기로 했다. 그 분이 애정결핍이라서 그렇다. 단단하게 사랑해줘야 한다. 오늘 교회가서 열심히 기도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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