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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10월의 마지막날 : 시동

 

 

 

 

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나는 열여섯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던 그 첫날의 첫인상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수학문제를 푸는 손과 귀에 꽂은 이어폰. 속으로 '첫날부터 밥맛이네.' 싶었습니다. 친구가 될꺼라곤 생각도 안했던 그 아이와 친해진 뒤에 나중에 물으니 영어듣기를 하고 있었다 했습니다. 나는 종종 그날을 꺼내면서 수학풀면서 영어듣기하는 독한년이라고 친구를 놀리기도 많이 놀렸고요.

 

 

친구와 나는 너무 많이 달랐는데, 나는 너무 즉흥적이었고 그녀는 너무 계획적이었으며 나는 말로 푸는 모든 것들을 좋아했고 그녀는 수로 푸는 모든 것들을 좋아했어요. 그녀는 늘 단정했고 나는 늘 부스스했고요. 나는 늘 뭔가를 떠들었고 그녀는 늘 듣고 있었습니다. 비슷한게 있다면 성적 하나였는데, 둘이 친구라고 하면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들이 재차 확인할 정도로 확연히 달랐던 둘이었지요. 예를 들면 이런식입니다. 새해 하루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요. '야 새해는 부산에서 맞는거야. 내일 새벽 다섯시 차 타고 떠나자. 동대구역에서 봐!' 그리고 눈을 뜨면 아침 아홉시. 핸드폰에는 새벽에 걸려온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문자 메세지.

 

 

감 찔러대듯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자고 하는 나의 친구가 된 몫으로, 그녀도 참 여러번 목적없는 여행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어느날은 부산으로 끌고가 무작정 아무 버스나 타자며 하루종일 부산 바닥을 뱅뱅 돌았던 때도 있고, 감자기 인터넷에서 봤다며 어느 저 멀리 섬이 있는 바다로 그녀를 끌고 간 적도 있어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갯벌에서 허연 조개껍질들이 무섭게도 빛날때 그녀가 문득 아주 오래고 깊은 비밀을 털어놓았지요. 친구가 된지 오년, 육년, 칠년도 넘었을 때였을꺼예요.

 

 

그 친구를 너무 많이 좋아하고, 어린 나이에도 싹을 보니 그 친구는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던 뭐가 되던 꾸준히 오래 질리지 않고 잘 할수있을 것 같아서 교복입은 어느 날에 보험을 하나 들었습니다. '너 어른이 되면 방 두칸짜리 집을 사서 나 한칸 살게 해줘. 내가 그대신 밥해줄게.' '그래.' 그 친구가 영 요리에는 소질이 없었거든요. 늘 안전하고 분명한 테두리 안에 살고 싶어했던 친구는 회사원이 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어요. 네모 반듯한 가죽가방을 맵시있게 들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습니다. 나는 그 테두리가 죽기보다 싫은데 테두리를 어여삐 여기는 저런 사람도 있는거구나, 하고요.

 

 

 

*

 

 

 

오늘 친구가 결혼을 했습니다. 10분전에 겨우겨우 도착해서 신부 입장전에 겨우 사진 한 장 찍었어요. 입구에 서있는 신랑에게 씩씩하게 손을 내밀며 '누구야, 축하한다!' 라고 웃었습니다. 작년 여름이었나,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나에게 소개를 시켜줬는데 보자마자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제 친구가 여태 만났던 남자들 중에 최고네요. 잘 부탁해요!' 라고 말했었거든요. 문득 갑자기 경주를 가고 싶다는 내 말에 군말없이- 물론 여친님께 점수따기용- 운전해준 고마운 남자기도 하고요. 그러고보면 난 뭘 자꾸 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은지. (막연한 느낌이지만 한국에서 평생을 살 것 같진 않아요.)

 

 

아무튼 오늘 친구가 드레스입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는데, 단상 곁에 붙어서서 친구 이름을 자꾸 부르다가 그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하필이면신랑쪽에 내가 서있었다고 하네요. 저 뒤에 서있던 친구들이 엉엉 우는 나를 뒤로 끌어냈고, 친구 어머니가 주유소 휴지를 꺼내주며 시집가고 싶어서 그러느냐고 웃으며 나를 달래줬어요. 친구 오빠가 참 잘생겼었는데 대학때 잠깐 보고 6,7년만에 본 친구오빠는 깜짝 놀랄만큼 아저씨가 되어있었고, 부케를 받는줄도 몰랐는데 친구가 씩씩하게 던져준 부케를 받을 수 있어 영광이고 기뻤습니다. 만약 내가 먼저 결혼을 했대도, 이 친구에게 부케를 던졌을테니까요. 나머지 친구들은 요즘 만나는 남자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 갑자기 나를 보며 '넌 아직도 얼굴만 보냐? 언제 정신 차릴래?' 라고 핏대를 세웠고요. (레파토리도 똑같습니다. 나는 언제 얼굴만 봤냐고 항변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니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기생오라비 얼굴에....')

 

 

부케를 안고 집으로 오는 길. 삶은 끄덕끄덕 하염없이 굴러가고 삶의 단계 단계를 또 밟아나가야겠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친구가 아이를 낳으면 테두리 바깥의 것들을 틈날때마다 몰래 이야기해 줄 생각이예요. 며칠전 누군가 나에게 '너도 참 지독하게 과거에 집착한다' 라고 했는데 피식. 그래요. 교복을 입은 우리가 함께 걸었던 벚꽃지던 밤과, 내가 그녀에게 토로했던 두려움 뿐인 앞날들과, 함께 떠났던 말도 안되는 이상하고 웃긴 여행들과, 스무살의 크리스마스와 웨딩드레스 같은 것들. 이별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에게 찾아가 산에 올라가자고 했던 어느 가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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