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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10월 30일 : 백수의

 

 

 

 

 

지난주에 쌔빠지게 인터뷰한 녹취파일이 없다. 오늘 새벽 핸드폰 메모리를 다 털었는데 하필 거기 딸려갔던걸까나. 어제 야근때 먹다 남은 김밥을 오전내내 한줄 반이나 삼키고는 점심시간을 틈타 집에 다녀왔다. 분명 나는 아침에 초싸이언이 되는겔게야. 같은 거리인데 출근할 때의 두배 정도가 걸린다니. 한낮의 동네와 집은 고요하고 예뻤다. 햇살은 아름답고 하늘은 맑고. 집에 도착해 컴퓨터를 열고 인터뷰 날짜를 찍어넣으니 다행히 파일 세 개가 걸린다. 유에스비에 담긴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얘들아, 언니 돈벌러 갖다올게. 가기싫다아아아아아. 집안에 도비 - 해리포터에 나오는 집요정 - 가 있을지도 모르니, 듣는이 없는 허공에 대고 돈벌러 가기 싫다는 투정을 징징 부리면서 아침에 개다 만 빨래를 개어 서랍에 넣었다. 도비가 있을리가 없겠다. 빨래라도 좀 개서 넣어놓을 것이지. 창으로 네모난 햇살이 들어와 비치는데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다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몹시. 오늘부터 꺼내입은 패딩점퍼를 다시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으니 왼쪽 주머니에 회사 카드키와 유에스비가 만져진다. 달그락달그락. 내 삶의 전부까진 아니라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상징같은 물건. 갑자기 확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며칠 전 원고때문에 10년만에 꺼내본 <이터널 선샤인>의 도입이 퍼뜩 떠올랐다. 주인공 남자는 갑자기 어느날 회사를 가기싫어서 아무 전철이나 집어타고 회사를 결근한다. 그리고 그날 운명같은 사랑을 만난다. 달그락달그락. 카드키와 유에스비를 줄곧 만지면서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백수인 듯해 보이는 청년 한 명과 마주쳤다. 물론 그는 백수의 유니폼인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그가 내게 같은 백수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식의 짧은 눈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얼굴에는 이 한낮에 일하러 가지 않는 청춘임을 자각하는 부끄러운 빛이 맴돌았던 것 같기도 하고. 문득 백수의 시간이 떠올랐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꼭 끝내야하고 그럼에도 어쩌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랬던 그 시간들. 의미없이 여유만 가득하던 한낮의 햇살이 문득 그립다. 회사로 향하는 내내 왼쪽 주머니에 든 것들을 휙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계속되었으나 영화 속 그도 대본을 던져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랬기를 바라는 놀부심보로 움켜진 왼손에 힘을 꽉 주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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