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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친의 날들

 

△ 그러고보니 정작 내 동생 자소서는 한 번도 봐준 적이 없는, 글 쓰는 누나.

 (미안하다 알아서 잘해라!)

 

 

 

 

 

오늘로 마지막 교정을 거의 마치고, 다같이 걸게 밥이나 먹자며 회사 근처 닭한마리 식당으로 우우가서 앉았다. 맥주도 꼴깍 한 잔 하는데 까톡. 어.

 

 

'누나 오랜만이죠' 라고 시작되는 인사. 이제 정말로 4학년 2학기가 되었다고, 내가 두어해 전에 - 메일함을 뒤적여보니 2013년 6월 - 손봐준 자소서를 참고해서 자소서를 쓰는데 다시 봐도 감동이라며, 사실 누나가 손봐준 자소서로 똑같은 곳에 다시 지원해서 붙었노라고 뒤늦은 감사가 따라온다. 이 친구 나 되게 미워했을텐데. 이제는 미운 마음이 좀 가셨을라나.

 

 

악세사리를 거의 하지 않는 내가, 특히 이름탓인지 반지를 잘 끼지 않는 내가 여름철이면 그래도 손에 종종 올리는 것이 꽃반지다. 이 친구가 만들어준 반지다. 낄 때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떠올라 마음이 온전히 산뜻하진 않지만 너무 예뻐서 낀다. 남중, 남고, 공대 크리를 밟는 이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 주겠다며 난생 처음 비즈라는 걸 사서 낑낑거리며 만든 반지인데, 어찌나 그 마음이 고맙고 예쁜지 반지를 받아들고 한참을 멍했었더랬다.  

 

 

씨익- 웃는 웃음이 매력적인, 완전 상남자 중의 상남자 같은 친구였는데 나보다 네 살이 어렸고 나를 보자마자 빛의 속도로 돌진해왔다. 처음에 나를 본 것도 잠깐이었을꺼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어딘가에 잠시 서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때 나를 봤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때 바로 좋았다고 했다. 왜? 그냥요.

 

 

나는 이 친구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서 극구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 친구는 굉장히 나에게 부지런했다. 아. 나에게 부지런했다기보단 자기 마음에 부지런했다. 내가 좋으면 되는거니까. 누나, 나 막 징그럽고 싫진 않죠? 그거면 나는 되요.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그 마음이 하도 부러웠던 것 같다. 어쩌면 저 아이는 나중에 실컷 다칠텐데 저렇게 용감할까. 그 아이가 많이 다칠까봐 내가 미리 아팠다. 미안했다.

 

 

사는 도시가 달라 자주 보지도 못했다. 몇 개월에 한 번 가끔 만나 차를 나누는게 다였다. 그 친구의 이런저런 고민들을 들어주기도 했고, 자소서 같은 걸 돌봐줬다. 내가 이 아이를 좋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 이 친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마음을 나에게 다 줬으니까. 어느 여름날에 예쁜 해바라기 한 송이를 쥐어주기도 했고, 갑자기 문득 하나도 안 예쁜 - 딴에는 열심히 골랐을 - 머리핀을 꽂아주고 사라지기도 했다. 늘 씨익- 웃었다.

 

 

겨울이었을게다. 가을과 겨울사이였나. 이 친구가 서울에 왔다. 그리고 나에게 마음을 달라고 했다. 안아달라고도 했다. 나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미안했다. 몹시.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좋아하지 말아달라 하는 것도 염치가 없고 나는 너를 영원히 못 좋아한다 고하는 것도 염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염치가 없는 여자가 되었네. 나를 많이 미워했을게다. 그리고 이 친구는 내 삶에서 증발했다.

 

 

'누나. 대구오면 차 한잔 해요. 진짜 진심으로.' 그러자는 나의 답에 너무 좋아하면서,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 몰래 봐야한다고 누나가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듣고 싶단다.

 

 

 

*

 

 

 

두어해 정도 사귀던 친구가 있다. 굳이 '구'를 붙이자면 구구남친. 작년 새해와 함께 이별을 맞이했고 이 친구와는 두해 정도를 사귀었다. 이미 오래 알던 친구였는데 나보다 한 살이 어렸고,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나 그 해를 며칠 남겨두지 않고 나에게 이상한 고백을 하고는 꽁지가 빠져라 달려 도망가버렸다. 나는 도망가는 그 등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나.

 

 

그 친구와는 많은 것이 잘 맞았다. 결이 아주 고운 친구였다. 비슷한 음악을 좋아했고 비슷한 책을 좋아했으며 비슷하게 섬세했다. 좋은 친구. 이 친구가 대학생이었다가 졸업을 하고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과정을 다 지켜봤다. 합격 발표날 기쁨에 들뜬 얼굴을 기억한다. 내 손을 꼭 잡고 맥주를 마셨다. 나를 올곧게 사랑해줬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챙겼고 자상했고 다정했고 깊었다. 어디 멀리 연수라도 가 있는 날이면 회사로 말도 안되게 예쁜 꽃다발을 보내왔다. 이런 남자가 남편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시간과 취향을 존중하며, 아내가 만든 밥을 불평없이 감사하게 잘 먹을 줄 알고, 주말은 아내와 보내고 싶어할 것이며 아내가 보고싶어하는 영화를 보고 아내의 손을 잡고 마트에 가는 것을 기꺼워 할 남자애였으니까.

 

 

어느날 이 아이와 손을 꾹 잡고 골목을 걷는데 문득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옆에 있고, 이렇게 좋은 밤을 자박자박 걷고 있으니 인생의 마지막 장면을 택할 수 있다면 지금쯤이라도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오래 살아야지' 라고 실없이 말했던 것 같다. 사실 슬펐다. 이 아이를 온통 사랑하는 여자가 이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나는 그 아이를 사랑 안 했다. 그 때도 알았는데 억지로 모른척 했다. 또 시간이 흘러서 그 아이가 문득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당신과 결혼 준비를 하고 싶어요.' 당신은 작은 출판사를 다니느라 돈도 없을테니 나 혼자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아득했다. 더 이상 이토록 다정한 사람을 내 곁에만 두고 싶다는 못되고 이기적인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안된다. 헤어짐을 고하고 많이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전화에 대고 '내가 너를 어떻게 잃어...' 하면서 애처럼 엉엉 울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다정하고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이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이 사랑인지 우정인지도 모르게 됐었다. 사귀던 2년내내 뒤범벅이 되있었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또렷하게 알게됐다. 헤어진 다음해에 우연히 한강 락페스티벌에서 이 친구를 만났다. 참 웃기지. 그 뒤 새로 시작한 반년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 정말로 처참하게 - 어찌할 줄 모르겠는 마음으로 달려간 락페스티벌이었다. 구남친 정리하러 갔다가 구구남친 만난 격이지. 그 넓은 공간에서 그 애를 딱 만났다. 동시에 진행되는 여러 가수들의 공연 중에, 하필 인기도 없는 가수의 공연을 함께 보고 있었던 것. 참 취향이란. 내가 그 아이를 정말로 사랑했었다면 모른척 했을텐데, 1년 반만에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이 불쑥 올라와 쫓아가서 인사를 했다. 아주 오랜 친구를 오랜만에 우연히 본 양.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손을 덥석 잡고는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그 때 바로 알았다. 나 얘 안 사랑했구나. 친구로 좋아했구나.

 

 

이 친구는 그 뒤로도 마치 숙제검사를 하는 것처럼 종종 얼굴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겹쳐 아는 사람이 몇 있어서 결혼식에서도 보고, 지인을 통해서도 듣고 그랬다. 이 친구는 그게 괴로웠을까? 작년 봄에 어느 자리에서 잠깐 보곤 그 뒤로 소식을 통 모르고 살았는데, 우연히 어제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도 나와 같은 날에 지인을 보자고 연락이 왔단다. 둘이 인연이냐며, 남자애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이 참에 다시 잘 해볼 생각없느냐고, 남자애가 그 정도면 괜찮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긁적. 걔한테 나는 아직 여전히 불편한 구여친일까. 보면 껄끄럽고 어색하고 옛날 생각 나고? 나는 내 인생에 굴러들어온 좋은 남자들은 죄다 발로 뻥뻥차고는 뭔 거지같은 연애하나를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붙들고 있다가 겨우 겨우 끝내고. 돌이켜보니 나를 좋다고 했지만, 내가 사귀지 않았던 남자들은 다 좋은 남자들이었어. 사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남자라는 평가를 덥석 내리는건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걔들은 하나같이 다 연하였고. (역시 연하남이 대세!)

 

 

 

*

 

 

 

내 손을 잡고 걷다가 문득 '지금 죽어도 좋겠다'고 말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을 온통 사랑했다. 너무 깊이 사랑해서 온몸이 다 아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도 그래요.' 라는 생각을 했을까. 함께 계단을 오르다가 뒤따라오르는 나를 돌아보며 돌연 '너랑 결혼했어도 후회했겠지? 후회했을거야.' 혼자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남자도 있었다. '내가 준비만 됐으면 너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을거야.' 라는 비겁한 말을 내뱉는 남자도 있었고 '당신이 이 동네를 좋아하면 내가 이 동네 가까이에 취직을 할게요.'라고 의미없는 미래를 귀엽게 기약하는 남자도 있었다. '난 결혼하고 싶은 여자 아니면 대시 안한다, 어떻게 네가 감히 나를 거부하느냐'며 비오는날 동네 근처까지 찾아와 나오라며 소리소리를 지르는 남자도 있었다. 외국인 친구인 솔로몬은 여자친구의 결혼하자는 말에 차갑게 'NO'를 고했다. 왜 그랬냐는 말에 '데이트하는 여자지 결혼하는 여자는 아니라고, 결혼은 너같은 여자와 하고 싶어' 라는 싸대기 맞을 말을 날렸다. 남자들은 다들 이렇게 쉽게 결혼을 하고 싶은걸까. 나랑 있으면 그렇게 죽고 싶은걸까.

 

 

나는 이상하게 결혼이란 키워드에 되게 드라이했다. 주변을 보면 얼른 결혼도 하고 싶고 애도 갖고 싶다는데, 결혼해서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 역으로 말하면 결혼을 안해서 뭐가 나쁜지 도통 모르겠다는거지. 게다가 왜 내 몸 망쳐가면서 또 하나의 생명을 낳아 쌔빠지게 고생해서 먹이고 길러야 되는지 모르겠고 - 이걸더러 이외수는 '이기심'이라고 말했지만, 자기 이기심따라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딨나.- 그 작은 애가 세상에 나와서 겪을 이런저런 풍파를 곁에서 지켜보기엔 난 너무 눈물많고 마음 여린 엄마가 될 것 같아 싫었다.

 

 

오죽하면 정말로 엄마를 앞에 앉혀놓고, 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결혼이란 것에 딱히 관심이 없다. 혹시 부모로써 마음 쓰이나. 자식의 결혼여부가 당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겠는가. 그렇다면 버티진 않겠다. 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나의 어머니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라는 멘트를 남기며 이 시대의 쿨모cool母상에 꼽힐뻔도 했지만 자꾸 생일선물로 사위가 갖고싶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탈락.

 

 

그래도 이런 내가 결혼이란 키워드를 슬그머니 삶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들어오게 한 어떤 순간이 있는데, 타로다. 불과 작년이다. 2014년 1월쯤이었으니까. 싸구려 타로 말고 꽤 진지하게 타로를 볼 줄 아는 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됐다. 옆 사람 괘를 들으며 그 정확함과 날카로운 말들에 팔뚝에 닭살이 뚝뚝 돋는데, 그 분이 나에게 결혼운이 좋다고 남편복이 있다는 말을 했다. 네? 전 결혼 관심 없는데요. 결혼을 하고 나면 내 인생의 국면이 완전 바뀔거라며 태양같은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태양이요? (대머리는 아니겠지.) 그때부터 맘에 차는 어떤 남자들을 속으로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나의 태양?' (웃지마!)

 

 

 

*

 

 

 

언젠가부터 그런 기분이 계속 들었다.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해보지 않은 기분, 한 번도 연애같은걸 해보지 않은 기분. 그리워서 아픈 사람도 없고, 보고싶어 닳도록 떠올리는 얼굴도 없고, 마음 뜨듯하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온돌같은 사람도 없고. 그저 순간순간 섬광같이 반짝, 누군가에게 극적으로 푹 빠지지만 늘 내가 빠져나올 수 있는 만큼만 알량하게 조절하며 좋아한다는 거. 연애같은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은거. 왜 필요한지도 이제는 모르겠는거. 마음이 하도 닳아버려서.

 

 

그래도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내 손을 꾹 잡고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죽어도 좋겠다고. 어느 만화에서 본 것처럼 결혼을 하루 앞둔 어느 밤에는, 당신이 우리집 앞으로 찾아와서 동네 모퉁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다가 내 얼굴을 잠깐 어루만져주고 갔으면 좋겠다.

 

 

나는 여성이라는 종특에 기대, 그리고 사랑 앞에 유독 멋쩍고 쑥스러워하는 특유의 수줍음으로 인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번도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한번도 놓친 적이 없으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앞으로는 좀 용감하게 빠져보려고. '나 너 좋아하냐!!!!!!!' 라고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캐묻지는 못해도, 나를 좋아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온통 흔들린다면 '나도!' 라고 싱긋 웃으며 이야기 해줘야지.

 

 

 

당신의 모두를 사랑했던

사뿐한 날들을 기억하며.

 

 

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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