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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짧은 연애를 마치고.

 

 

 

 

 

 

아무에게도 한번도 말은 안 했지만 '사람으로 사는 것이 나에게는 안 어울린다' 라는 생각을 늘 하며 지냈습니다. 길가나 화분에 심겨진 가느다란 꽃 한 송이를 마주할 때면 '난 왜 꽃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라는 자괴 어린 눈빛으로 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곤 했어요. 꽃들도 그들 나름대로, 의지를 내어 그 자리를 근근히 버티고 있는 것일텐데 삶에 대한 알량한 의지조차 자주 상실해버리고 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사람'이란 타이틀이 꽤나 무겁고 거창하게 느껴져 왔거든요. 맘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끝까지 가 닿지 못한 것은 단지 노력이 부족해서라면서요. 사람이란 족속은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겁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그 무겁고 어려운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은 너무나 만족스러우니 난 어쩌면 좋을까요. 영화관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고요히 눈물을 흘리는 것도 좋고, 마음 맞는 누군가와 여름밤을 기울이는 맥주 한 잔도 상쾌합니다. 기타 선율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심장 한 구석이 덜컥 거리고, 홀로 오롯이 깨어 새벽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도 좋아요. 아주 예쁜 접시에 마카롱을 담아낼 줄 아는 까페를 발견하는 기쁨도 알고 있어요.

 

 

*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 하잖아요. 할 수 있을 때. 젊을 때. 난 그 말이 싫었거든요. 한 사람을 깊게 깊게 끝까지 서서히 알아가는 기쁨이 나에게는 더 크고 소중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됐어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어중간한 연애를 하고 나니, 연애를 많이 해보라는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네 스스로를 잘 알아라.' 하는 깊은 뜻인줄은 알면서도 '헤어짐에 덤덤해져라. 아직도 눈물을 흘린다면 넌 멀었다.' 라는 알량한 말로 해석하고 싶네요. 이별 앞에 덤덤해져라. 사람으로 사는 것 중에 가장 힘든 일이 마음을 주고 받은 누군가와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헤어짐을 겪으라고 종용하다니. 많은 연애를 해보라는게 많은 이별 앞에 덜컥, 의연하게 서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젠장.

 

어제 밤새 앓다가 출근을 못하고, 시꺼먼 방에 혼자 누워있었거든요. 그리고 친구에게 되게 유치한 문자를 보냈어요.

 

- 진짜 인연이라는게 있을까? 상황과 시간이 우연히 맞아서 만나게 되는 사람말고, 진짜 만나야 하는 사람 있잖아.

 

난 어제까지였던 나의 연인이, 나에게 꼭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생에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 웃는 모습이 예쁘고, 웃지 않아도 예쁘고, 무심한 상황에서 뱉는 유의미한 표현들로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사람. 때로는 누가 가져갈까봐 예쁜 모습을 숨기고 싶은 사람.

 

친구가 답이 왔어요.

 

- 진짜 인연은 널 힘들게 하지 않을거야.

 

그 문자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그제 본 영화를 떠올렸어요. '10대의 손수건을 적시는 영화' 라며, 하이틴 로맨스 정도로 낮게 평가받는 영화였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고 있었거든요. 내게 손수건이 있었다면 '10대 감성을 지닌 20대의 손수건까지 적시는 영화' 라며 평점을 높게 주었을텐데. 어쨌거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해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어.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받을지는 선택할 수 있지. 난 네가 내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아도 좋아."

 

어떻게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도 나를 힘들게 하는데. 진짜 인연은 (그런게 있긴 하다면!)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 힘듦을 내가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닐까 해요. 상처를 받는다면 '너'에게 받겠어! 야심차고 알량한 포부같은 것. 나처럼 사람으로 살기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감히 '너라면 나에게 상처줘도 좋아' 같은 다짐을 할 수 있을까요?

 

잠자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회의하는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오후에는 출근을 해야지 싶습니다. 하나마나한 미팅도 또 잡혀있고. 어떤 감정에 깊게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시스템이라는게 참, 때로는 다행이다 싶고 때로는 원망이다 싶고 그렇지 않아요? 누군가를 만나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고, 누군가를 잃어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게.

 

 

 

(이미지 출처 : 웹툰 상상고양이)

 

 

 

* 2014년 8월 27일 쓴 글이나 '헤어져!'가 두 번이상 반복된 사이라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헤어지지 않고 있다가, 9월 중순 무렵 헤어지고 나서 10월에 오픈

 

하려다가 닫고 있었는데 1년 지나서 오픈합니다. 2015년 8월도 오늘로써 끝이네요. 아디오스! 

 

*1년 뒤에 읽어도 좋군.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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