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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8월 25일 : 8월의 크리스마스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는데 - 나도 참 징하지. 하루종일 글 만지고 집에 와서는 자정을 넘겨서 또 뭔가를 써 넣는다는게 - 현진에게 카톡이 왔다.

 

 

/ 반지. 창문 열어놨어? 바람이 불어서 시원해. 가을 같아!

 

 

기어이 가을. 다시 가을이 살금 사람들의 입술에 올라앉는 계절이 왔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코끝이 살짝 시큼하지만 짐짓 아직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었는데 말야. 결국 다시 가을이구나.

 

 

/ (나) 이런 밤엔 맥주지. 좋아하는 사람 무릎베고 맥주 마시고 싶다.

/ 보노보노 보고 싶어. 너와 나의 정서 차이가 이렇구나. 난 보노보노나 보고.

 

 

 

*

 

 

 

퇴근하는데 전화가 왔다. 밤 11시 14분. 부재중 김여사. 왜? 한달에 한 번 끽해야 통화를 할까말까한 애틋한 우리 사이 아니던가. 이 늦은 시간에 작은 불안감을 안고 전화를 넣었다.

 

 

/ 어무이. 이 늦은 시간에 왜?

/ 니 야근한다매~~~~?

/ 뭐? 야근이야 늘 하지. 오늘은 마감때문에.

/ 니 얼마전도 마감이었잖아.

/ 아 그건 8월꺼고 지금은 9월꺼.

/ 아이고 회사가 아를 잡네 아를 잡아.

 

 

밤 아홉시께끔 아버지가 전화가 왔는데 한창 조용히, 그리고 바쁘게 집중하던터라 '아 지금 일하는데 나중에 연락할게요' 똑 끊어버린거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시 이야기를 했나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당신의 생일을 착각해서 미역국을 안 끓여준다고 서운해하더란 얘기, 동생은 연락이 따로 없었느냐는 얘기,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애가 취직 생각은 있는걸까나. 남자애들은 군대때문에 원래 여자애들보다 삼사년은 늦어요. 가는 공익이잖아!. (어이쿠 그걸 또 기억하시네. 공익의 설움). 너는 뭐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방값이 비싸서 어떡하느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지남이 생일이야. 내일.

/ 어? 맞나?

/ 그래요. 미역국이라도 끓여주세요. 섭섭해한다.

/ 아이고~ 미역 사야겠네.

/ 우리집은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나.

 

 

전화를 끊고나니 자정을 넘겨 8월 25일. 내가 즐겨 애칭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동생님의 생일. 역시 야행성 인간답게 새벽 1시가 다 되어 전화를 넣어도 받는구나.

 

 

/ 생일 축하해!

/ 어 고맙다 어허허

/ 어디고?

/ 그냥 놀고 있지.

/ 이번주 금요일에 아부지 생신인거 잊지마.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 어 그래 알았다

 

 

 

*

 

 

 

작년 이맘때가 궁금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 하늘색 종이를 하트모양으로 오려 그 사람 이름을 써 넣은 적이 있었다. 육포를 좋아한다고 해서 직접 소고기를 사서 핏물을 빼고 양념을 만들어절여 육포를 만들어 선물한 것도 이맘때구나. 올해는 매니큐어를 전혀 바르지 않았는데 작년 여름은 새빨간색 매니큐어를 좋아했구나. 누군가를 정말 많이 좋아했구나. 사랑했었구나. 아.

 

 

몹시 사랑했던 사람과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는 이야기를 얼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모든 사진을 다 그대로 가지고 있어. 아주 옛날 것부터. 라고 했더니 '멘탈 갑' 이라는 훌륭한 평가가 돌아왔더랬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난 내가 거쳐오고 품어온 시간들이 소중한거야. 그 시기에 어떤 사람이 함께 했던거고. 그래서 당장은 마음 아파서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내 삶의 등장인물이니까 그래서 소중한거고.

 

 

요즘 작년에 나와 잠깐 연애했던 그 사람 사진을 문득 잘 본다. 아파서 한 해를 들여다보지도 못하다가 요즘 겨우 들여다본다. 내가 이런 사람을 사랑했었나?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나? 생경하다. 사랑에 빠져있는 내 얼굴도 들여다본다. 좋냐? 너 곧 헤어진다. 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