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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정서가 참 예쁜 사람

 

△ 열두시간짜리 내 선배.

 

 

 

매일의 이력서를 부르짖는 선배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이력서를 쓰려고 마음먹은 수요일 새벽.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몇 줄을 끄적이다 포기해버렸다. 나 앞으로 잘 해보겠다고 진심을 가득 담아 보냈건만, 내 마음을 이해하던 새벽 선배는 열두시간쯤 지나자 신축 사옥을 팔면서까지 매일의 이력서를 다시 부르짖는 오후 선배로 변해버렸다. 아아. 어쩌랴.

 

'여기 대표가 옷을 일본 작가처럼 입는다' '존심 세우지마라. 너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안다' '홍대에 5층짜리 사옥을 짓는다' 하나같이 설득력없는 이야기지만 - 그게 이 사람의 매력이긴하다 - 건물까지 파는 선배를 보고서는 피식 웃음이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 오늘은 면접도 보러가야하고, 솔로몬도 만나야해서 지속적으로 예뻐야 하는 날. 아침에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는 부른 배를 두드릴 새도 없이, 우왕좌왕하나보니 시간이 훌쩍갔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은 나름 눈썹도 그려야하고- 눈썹이 숱도 많고 굉장히 짙은 편인데, 미모 업그레이드를 위해 눈썹칼을 빼들었다가 눈썹을 반이나 날려먹었다. 울면서 눈썹 연필을 샀다 - 속눈썹도 올려줘야 하고, 맨발에 샌들을 신을꺼니까 발톱에 색칠도 좀 해줘야 한다. 또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향수도 살짝 뿌려주면 좋고. 친구들 집에서 자게될 경우에는 머리를 슥슥감고 어디 철푸덕 앉아서 자그마한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작업(?)을 한다. 지금 지내고 있는 친구 집에서도 그렇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오늘은 눈썹 잘 그렸는데?' - 다른 날은 어떠냐고 차마 물어보지 않았다- 라던가, '우리 반지 화장하는 각봐라' 라고 스치듯 코멘트를 하면, 무덤덤한척 하지만 사실은 화끈 달아오른다. 아유 부끄러.

 

한창 외모에 관심 많은 사춘기 때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엄마한테 혼이 났다. 엄마는 자식들이 외모 가꾸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는데 - 그러면서 지금은 꼭 어디 데리고 나가서 '아유 우리 딸이예요' 인사시키고 '딸내미 예쁘네' 라던가 '딸내미 몸매가 늘씬하네' 라는 말을 받아내는 걸 좋아한다. 물론 반년간의 백수생활로 인해 현재는 얼굴과 몸이 형편없이 부풀어있다. 어헝. 근데 또 맥주는 잘도 마시러 다니지. 아몰랑 - 그런 엄마를 무서워해서, 혹시라도 새끼손톱에 몰래 매니큐어라도 바른 날이면 새끼손가락을 굽힌 채로 한번도 펴지않고 젓가락질을 햇다. 니 손다쳤나?. 아니. 근데 밥을 왜 그렇게 먹노 바로 먹어라. 네...

 

그런 어머니 밑에서 화장 같은건 엄두나 냈겠는가. 어머니 역시 화장과는 담을 쌓은데다가, 한여름에도 선크림조차 취급하지 않는 쿨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화장을 안하고 학교를 다녔다. 할 줄도 몰랐고. 가끔 뭔가를 얼굴에 바르긴 했는데, 선크림 바르는 것조차 서툴러서 늘 턱선에 남아있곤 했다. 그걸 알려준건 고맙고 부끄럽게도 늘 남자들이었고. 이런 식이었지.

 

- 반지는 화장 안하는게 더 예쁜 것 같아요. (팩트라는 것을 시도했으나, 뭐가뭔지 몰라 얼굴에 가뭄이라도 난 마냥 화장이 쩍쩍 갈라진 상태)

- 반지야. 니 턱에 허연거 뭐가 묻었는데. (선크림을 바를 줄 모르는 25세.)

- 니 울었나. 눈이 퉁퉁 부었노. (아이새도우라는 것을 눈두덩이에 발라보았으나 밤새 울고 잔 효과를 획득)

 

그리고 얼굴에서 눈이 제일 먹어준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 눈을 더 커보이게 하는 아이라인이나 바짝 올린 속눈썹 따위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다가 어떤 사람한테 홀딱 빠졌는데, 그 분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눈썹 정리를 하는 멋남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여자친구도 멋녀이기를 바랬고, 화장도 예쁘게 할 줄 알았으면 했다. 그때부터 아이라인이라는 것을 시도했는데, 큰 눈에 아이라인을 그리면 얼마나 싸납때기같이 보이겠는가. 아이라인을 그리고 갔더니 '아 이런식의 화장은...' 이라는 탄식이 쏟아졌고, 그리지 않고 갔더니 '화장 안 해?' 라면서 은근히 화장을 종용한다. 꾹꾹 눌러담다가 '아 화장하면 이상하다고 뭐라하고 안하면 하라고 뭐라하고 어쩌라고!' 라면서 빽 화를 냈더니 '예쁘게 하면 되잖아.' 라는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지금은 아이라인은 그리지 않고, 속눈썹은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한 날에만 올리며, 입술색이 짙어서 립스틱은 바르지 않는다. 립스틱 모으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 이사를 하며 나의 립스틱 컬렉션도 분실해버렸고.

 

아무튼 오늘은 계속적으로 예뻐야하는 날이니 몇가지 화장품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입술도 좀 바르고 할 요량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파우치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태국에서 산 큰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가방이 깊어 못 찾는건가 싶어 가방 속을 들여다보느라 머리를 반쯤 넣었다가 웃음이 터졌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번쩍 카톡. '코트가 잘 어울린다고 자부하는 겨울 태생~' 가방에 머리를 집어넣고 막 웃고있으니. 옆자리의 남자가 몇 번 흘끗 쳐다본다. 같이 들여다보실래요?

 

 

* 정확히 1시에 딱 면접장소에 들어섰는데, 연예인 김희애를 닮은 선이 가늘고 세련된 분위기의 여성이 나를 맞아주었다. 선배가 왜 '결이 고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정도. 포트폴리오로 제출한 나의 기사 몇 편과 블로그를 읽어보았으며, 정서가 참 예쁜 사람같다는 말을 들었다. 정서가 예쁘고 아기자기하다고. 꾸준히 쓰는 것은 부지런한 것이라며, 글을 쓰는데 있어 부지런하고 자기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갖고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빨리 쓰느냐는 물음에 빨리 쓴다고 이야기했더니 그것도 참 좋은 자질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대해 애정을 많이 품고 있는 사람이라 답했다. 과거의 기억에도, 작은 물건에도, 스치는 말들에도.

 

내가 좋아하는 수정과를 내준 것도, 나라는 사람을 간결하며 표현할 수 있는 한 마디를 찾은 것도 좋았다. 나는 정서가 예쁜 사람이구나. 또박또박 그 말을 되새겨보았다.

 

 

* 유무선씨는 알려나. 오늘 서초에서 출발해 홍대를 갔다가, 홍대에서 면접을 하나 보고 나와서는

일주일전까지 꼬박 삼년을 살았던 동네로 차근차근 걸어갔다가 볼일을 하나 보고

다시 이태원에 도착해서 길을 헤메기까지 계속 이야기 중이었다는 거.

 

강남에서 마포, 마포에서 용산에 이르는 긴 여정을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훗.

오늘처럼 기분좋은 이야기도 많이 나눠요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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