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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better

 

△ 너란 여자, 사진빨이 안 받는구나.

 

 

 

지금도 음반을 산다. 돈지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무언가를 형태로라도 꼭 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 음반을 산다. 마치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종이 위에 또박또박 옮기는 것처럼, 절대로 옮길 수 없는데 최선을 다해 옮겨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마음으로 음반을 산다. 아무튼.

 

요즘은 핸드폰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봄과 어울리는 발라드' '무시해선 안 돼! 아이돌의 가창력' '힙합에 재즈같은걸 끼얹나' 등으로 친절하게 분류가 되어있다. 이삿짐을 싸면서 정신을 놓고 있을때가 많으니 그냥 아무거나 틀어놓는다. 꽂히면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노래 제목을 확인하는 정도.

 

지금 돌아가는 노래는 정엽의 <Nothing Better>. 자켓을 보면 흰 셔츠 단추를 가슴께까지 다 풀어해치고는 허리 디스크 걸릴 것 같은 자세와 이구아나 헤어스타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정엽씨가 있다. (하나도 안 섹시하다.) 이 노래 마지막 부분에 '낫띵 베러러러러어얼~ 낫띵 베러러러러어어얼~~댄 유우우우우우우우 끄아아아아아아'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이 있는데 - 끄아아아아아는 내 목소리인걸로- 나도 모르게 볼륨 조절을 못하고 정엽씨와 함께 심취해서 몇 번을 부르고 나니 이 노래에 얽힌 옛 추억이 생각난다.

 

몇 해전 이 노래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빵 터진 적이 있기에 지금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겠지만, 내가 이 노래를 처음 알게된 계기는 대학시절 남자친구 덕분이다. 그러고보면 나의 음악적 지평(까지라고야 할 건 없겠다만)을 넓혀준 건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다. 손녀입으로 트로트 듣기를 좋아했던 외할아버지 때문에, 네댓살 무렵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트로트 수십곡을 꿰차고 있었으며 - 어느 날은 부르기 싫다고 끝끝내 버티다가 엉엉 운 적도 있다. 그야말로 내가 음악노예 아니었던가!- 초등학교 2학년때는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꺼야>에 심취해 책 귀퉁이에 열심히 가사를 옮겨 적었다. 아, 김원준과 류시원이 열연한 <창공>드라마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때 나는 김원준과<세상은 나에게>라는 노래에 미쳐있었다. 기타 피스도 사고, 피아노 학원에서는 맨날 그 노래만 쳐댔다.

 

 

한때는 내가 만든 어둠 속에
스스로 빠져 울기도 했지만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지지만은 않을 거야 ← 요기서부터 멋있음이 피어오르고
지금부터 난 다른 내가 되어야 해  ← 여기서 멋있음 1차 폭발

내가 웃는 등 위엔 고독이 따르겠지만 ← 여기서 멋있음 2차 폭발 (크아!)
그건 날 오히려 더 강하게 하지
기다리는 이에게 저절로 돌아오는 건 없을 걸
일어나 먼저 부딪혀 보는 거야

 

 

4학년인가 6학년 무렵에는 동생이 가져다준 믹스테잎 덕분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그 때 테잎에 들어있던 노래가 일기예보의 <좋아좋아>-지금도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였는데, 그 때 테이프가 닳도록 들으면서 나의 취향이 이 쪽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 아, 다시 <Nothing Better>로 넘어가면, 이 노래가 전혀 유명하지 않을 때였는데 남자친구의 컬러링이어서 전화할 때마다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받지 말라고 미리 말해놓고는 계속 노래를 들었던 적도 있고.

 

그 친구가 리쌍을 굉장히 좋아했었고, 넬도 좋아했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아마 랩에 대해서 별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 싶은데, 그 당시에 남자친구를 기쁘게 해주려고 종종 리쌍 랩을 시전하다가 거기서 뜻밖의 소질(?)을 발견.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신나게 랩을 하는 여자가 됐다. 그 후에 만난 사람도 으레 랩하기를 좋아하는 친구였고, 나에게 비트박스까지 가르치려 했지만 연애기간이 짧아 미수로 끝났다. 나는 종종 나의 20대 전부를 연애 한 번 하지 않고 지났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데, 2년 이상을 만난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말로 아무도 좋아해본 적도 없고, 아파본 적도 없는 느낌. 모태 솔로의 느낌적인 느낌.

 

예전에 '음악으로 기억되는 인연들'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도 이래저래 음악으로 기억되는 연인들에 관해 쓰고 있구나. 또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아무튼 그렇다. 연애한 느낌은 하나도 없고 되게 아득한데, 나의 사랑들이 나에게 남겨준 노래는 많다. '좋아하는 음악 하나 없는 남자에겐 마음 주지 않겠어!' 라는 날선 연애 지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의 사랑들은 다들 뚜렷하게 좋아하는 음악이 있었고 각자가 달랐구나 싶다. 나의 사랑이 <Nothing Better>에서 <몽환의 숲>을 지나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와 함께 아팠고, 그 뒤에는 <기다림>. 그리고 가장 최근의 연애는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당신이 좋아하던 노래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좋다고 했던 노래만 잔뜩 생각이 나네. 내가 좋은 노래를 와르르 알려주려고 하자 하나씩 천천히 알려달라고 했던 그 말이 기억난다.

 

나의 음악은 기타다. 기타 선율만 들으면 마음이 그렇게 뛴다. 느릿하고 고요하게. 늘 농담처럼 '내 남편될 사람의 옵션은 기타 실력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니는데, 참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느릿하고 고요한 선율을 따라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도 두 손 꼭 붙잡고 따라가게.

 

 

 

(*) 내 님이 나타나면 '왜 이제야 왔냐!' 라는 서슬퍼런 분노의 양 싸다구를 선물처럼 날려주겠다는 다짐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습니다. 때리지 않을테니 나타나시오. 이제 슬슬 나타날 때도 되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