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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우리는 아름다워야만 한다

 

△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 장판 감기때문에 잠도 오지 않고, 누워서 페이스북에 뭔가를 찌끄리다가 어줍잖다 싶어서 컴퓨터를 켰다. 글이 늘려면 비밀글을 쓰지 말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는데, 나는 자꾸만 혼자만의 공간에 이러고 있네. 아. 글은 몰라도 비밀글은 확실히 늘겠다. 피식.

 

 

* 페이스북에 찌끄린 첫 문장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 이다. 페이스북에 과정 예찬론을 늘어놓다 슬쩍 치워버린 이유는, 과정 속에서 미추를 따지기는 커녕 그 시간을 견뎌나가는 것조차 대단한 사치로 여겨질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 삶에서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음악가에 관심이 많다. 음악가 외적인 그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심지어 음악인이 아닌 한 개인의 본명같은 것도- 음악가로서의 모든 것에는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고 말지만, TV 토크쇼에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이 나다. '삶'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음악'이라는 작은 동그라미가 들어있는건데, 당연히 그 작은 동그라미 안에 삶이 배어나올 수 밖에 없는건데도 나는 철저하게 작은 동그라미만 향유하고 싶어하는 관객. 우동국물에 떠있는 오뎅만 좋아한다고 해서, 그 오뎅에 국물맛이 안 나는 것도 아닌데. 그 오뎅이 맛있는 건 사실 국물때문인건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사실 어떻게 '음악가적인 삶'과 '음악가 외적인 삶'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유년 시절 어떤 음악가를 존경했는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음악가로서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는지, 이런 가사는 어떤 생각에서 쓰게 됐는지. 그래서 '음악가는 음악으로만 말해라!' 라는 이기적인 논리를 견지하면서도, 음악가의 삶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이런 가사는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었고,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알고 싶었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고, 이 곡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사실은 음악가의 삶에 관심이 많은 관객인지도 모르겠다.

 

 

* 좋아하는 무명의 한 음악가가 있다. 어제자 페이스북에 '나라서 미안하다. 거울을 보며 뺨을 수십차례 때렸다. 좋아하는 일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지겹다' 라는 뉘앙스의 긴 글이 있었다. 가끔 그는 이런 글을 올린다. 뭐라고 말해줄 수 있겠는가. 각자는 상대의 고통을 머리로 가늠할 뿐이다. '과정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라고 내가 어찌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워야만 한다. '아름답다'의 어원이 '앓음답다'라더라, 라는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서라도 우리는 아름다워야 한다. 나의 온갖 것을 갈아넣더라도 결과는 어쨌든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결과의 패는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다. 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패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걸 자꾸만 내가 쥐고 싶어하고 내가 흔들고 싶어하고 잘 안되면 내 탓을 하니까 더 힘들어 지는거다.

 

우리가 쥐고 흔들 수 있는 패는 과정 뿐이다. 그러니까 과정, 스쳐가는 순간을 아름답게 하자. 과정에서 너무 고통스러웠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못했을 때 두 배의 고통이 나의 싸다구를 후려 갈길 것이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라는 무서운 고통이 나의 싸다구를 왕복 콤보로 후려 갈 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승리를 하자. '그래도 아름답게 지나왔다' 라고 반추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완충지대는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예술가도 아닌데 부모로부터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꺼냐. 언제까지 그렇게 불안하게 자리도 못 잡고 고생할거냐.' 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문득 기뻤다. 일단은 부모의 눈에 어긋났다는 것에 대해서, 부모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고 적어도 나의 뜻대로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중인 것 같아 문득 기뻤다. '나는 진짜 내가 나이기를 바래요!' 라는 나의 말이, 한 문장안에 '나'라는 주어가 세 번이나 들어가고 말하는 화자조차 '나'인, 그래서 부모 앞에 문득 펼쳐진 내가 네 개나 있는 그 상황이 - 어머, 내 새끼가 분신술을 쓰네? 이 놈의 새끼! -.

 

 

* 나는 뭔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나를 자주 울게하고 가슴을 쥐어뜯게도 만들 것이며, 자주 내 삶이 가치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신승리라도 해야겠기에 지나오는 매 순간이 아름답다고, 아름다웠노라고 자뻑이라도 하며 살아야겠다. 이 세상의 동지들아. 다 함께 승리하자라는 말은 못해도, 다 함께 정신승리는 하자. 내가 당신들 품에 승리를 안겨줄 깜냥은 안되도 정신승리쯤이야 얼마든지 안겨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