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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시시한 것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어

 

△ 산비탈을 헉헉 대면서 오르는데 저 멀리서 개 두 마리가 겅중겅중 달려왔다. 몹시 기쁜 마음에 개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마음먹은 바가 있어 하루에 한 편에서 두 편정도의 글을 꾸준히 (다시) 쓰기로 했다. 오래전에는 아무도 안 시켜도 새벽까지 모니터 앞에 붙어앉아 낄낄대며 재밌더니, 언제 이렇게 생각과 마음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나에게 무겁고 귀찮은 일이 되었나. 이번에 고향집에 며칠 머무르는 김에 마음내어 다락에 올랐다. 예전에 써두었던 노트들을 꺼내어 들추어 보았더니, 확실히 생각과 시각은 지금보다 어릴지 몰라도 더 잘 쓰더라. 좀 많이.

 

 

△ 내 방에 딸려있는 다락. '다락'하면 왠지 낭만의 대명사 같지만, 실상은 관리가 안되어 칠이 똑똑 벗겨져 계단에 소복히 쌓여있었다.

 

 

일주일 전에 강원도 어느 산골에 있는 작은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고즈넉한 산골이었지만 의외로 밥상 차려내고 치우기 바빠서 산골의 정취는 느끼지 못했고, 되려 오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갈피를 정리했다. ITX 2층을 꼭 타야한다는 나의 주장에 춘천역 인근에서 두 시간여를 배회하다 급하게 닭갈비를 뜯고, 열차에 몸을 실은 일요일 저녁. 옆자리는 내가 참 좋아하고 동경하는 어느 멋진 번역가 언니.

 

별자리를 봐주겠다는 언니의 말에 생년월일과 일시를 불러주고는 창밖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별자리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굵직한 책들은 이미 다 사 보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입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 역시나 같은 괘. "너는 역시 출판사 같은 곳을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글, 그림, 예술 쪽으로 완전 다 몰려있는 별자리야. 넌 이쪽으로 재능을 많이 타고 났고, 이 쪽으로 가는게 맞는 사람이야." 그리고 언니의 눈으로 들여다 보았을 때, 나란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들었다. 언니는 사람에게 마음을 쉬이 열지 않는데, 너와는 그러지 않았다며 신기하다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너 외롭니?"

"글쎄요?"

"별자리에 의하면, 너도 되게 짝을 찾고 있는 사람인데. 엄청 좋은 짝을 만나게 될거야."

"저 그거 알아요. 뭘 보든 남편 운이 좋게 나오더라고요. 난 사실 결혼에 별 관심도 없는데."

 

그러면서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는 몇 년만에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져있다. (급기야 한 남자선배는 언니의 연애소식을 듣고 "야! 너 정말로 레즈비언이 아니었냐?" 라고 소리칠 정도였으니.)

 

"언니가 꽤 오랫동안 연애를 안 했잖아요. 거의 삼 사년? 그래서 난 언니가 연애같은 건 관심 없는 줄 알았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난 정말로 나를 이해받길 원했거든. 그래서 왠만한 시시한 관계는 눈에 차지도 않았어. 정말로."

 

언니와의 대화에서는, 나는 글쎄요-를 견지하며 내가 짝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를 고민했지만 썩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어버이 날이나 생신 등 시즌 때마다 '내게 필요한건 사위'라는 한 단어로 통일하는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에 힘들긴 하지만, 내게 필요한건 남편이 아니기에. (그러나 저러나 어머니는 정말로 반성해야 되지 않는가. 그렇게 딸내미가 남자 만나는 걸 감시하고 반대하다가 갑자기 사위 타령이라니. 빅 이벤트로 여자를 데려가 버릴까보다. 콱.)

 

목마름은 아쉬운 상황에서 또렷하게 알 수 있다. 언니와 그런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어떤 분과의 만남이 있었다. 볕 좋은 까페에 앉아 좋아하는 과일 쥬스를 마시고, 좋은 차를 타고, 좋아하는 동네에 가서, 아주 맛있는 밥을 먹고, 이야기를 실컷 했다. 하루내내 내 마음이 까슬까슬 삼베같았다.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들이부어도 까슬까슬 할 것이다. 해봐서 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부어봐서 안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당신의 말이 맞노라고. 난 절절한 사람이었노라고.

 

며칠 전 걸려온 술취한 전화 한 통은 "너는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아. 너는 좋은 사람 만날꺼야. 근데 결혼하지 마. 개새끼야. 다 내꺼야!" 라며, 미리 나의 결혼을 서슬퍼렇게 축복해 주었고, 어제 마침 열차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대구에서 서울로 오는 두시간 내내 "아가씨, 꼭 결혼하세요. 결혼은 좋은거예요." 라며 결혼 및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 (심지어 아주머니의 원래 자리는 내 옆자리가 아니었다!) 나에게 "아가씨, 꼭 결혼해요." 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고, 내리면서도 귀엣말로 "아가씨, 언제까지 예쁘고 어릴 것 같지? 안 그래." 라며 내 팔목을 살짝 꼬집었다. 섬뜩.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아도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를 따라다닌다.

 

올해 결혼하는 내 친구처럼, 얘랑 연애할 것도 결혼할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는데 문득 돌아보니 이렇게 되었다가 될까. 얼마 전 결혼한 어떤 언니처럼, 애를 안 낳을거면 몰라도 이왕 낳을거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라는 말에 쫓겨 결혼하게 될까. 아니면 어쩌다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고 토로하는 누군가처럼, 어느새 그 나이에 다다라 나 역시 토로하고 있을까. 아니면, 몇 해전의 나처럼 상대방으로부터 '결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황망해하며 또 다시 도망가게 될까.

 

정리를 해본다. 내 남자의 덕목.

 

* 눈이 크고 선한 사람.

* 말없이 마주보고 앉아있으면 내 어깨 위의 공기가 들썩이는 사람.

* "그거 너무 좋지 않아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응수해주는 센스를 갖춘 사람.

* 마음의 결이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

* 인생의 방향이 뚜렷하고, 열심히 그 길을 가는 사람.

* 마누라 밥 안 굶길 사람.

* 내가 힐을 마음대로 신어도 될만한 기럭지. (물론 나는 운동화를 훨씬 더 자주 신긴한다.)

* 같이 공연장가도 내 허벅지 안 꼬집을 사람.

* 자주 헤메고 슬퍼지려하는 나를 현명한 눈길과 따스한 손길로 일으켜줄 사람.

* 꽃다발을 불쑥 내밀줄 아는 사람.

* 나무와 꽃을 좋아하는 사람.

* 나에게 자주 노래 한 자락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

* 기타를 잘 치는 사람. (옵션)

 

혹은

* 위의 모든 덕목을 일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만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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