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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내 집

 

 

 

오랜만에 새벽에 일어나 과일을 갈아마시고 세탁기를 돌리고 여유를 좀 부리다가, 출근 시각이 촉박해서야 다급하게 머리를 감고 나오는 아침. 뚝뚝 젖은 물기를 수건으로 눌러짜는데 '빼요요옹' 하고 경박스런 초인종이 울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 "박스 어쩌고 저쩌고" 라는 주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와 대충 급한대로 위아래를 챙겨 걸치고 문을 열었다.

 

주택 임대차 보호법? 아무튼 어떤 서류에 몇 가지만 적고 싸인만 하면 된다며 "보호해주는거야." 라는 말을 하는데, 그럼 내가 작년 7월에 입주해 이 곳에서 먹고 잔지 이제 곧 1년이 되어가는데 왜 그동안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나. 뭐 굳이 캐묻지 않아도 법으로부터의 집주인 보호에 관한 서류겠지만, 머리에 젖은 물을 뚝뚝 흘리며 어떤 배나온 아저씨와 집주인이 건네주는 몇 가지 서류에 싸인을 하고 불러주는대로 받아적고 신분증을 보여주고 돌려받는 절차를 거쳤다. 너무 급해 아쉬운대로 벽에 대고 받아적고 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는 아침.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나의 아침을 깊게 할퀴운 기분이 들어서 불쾌했다. 이어서 옆집에서 들려오는 '빼요요옹' , 또 '빼요요옹'. 아침 잠결에 정신없이 끌려나와 불러주는대로 받아적는 세입자들. "박스 어쩌고 저쩌고" 라는 주인 아줌마의 목소리는, 내가 입구에 빼곡히 쌓아놓은 종이상자들이 중요치 않으면 갖다 버리라는 말이었다. 언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소중해서요." 라고 말하고 계속 쌓아두겠다는 무언의 의사를 밝혔다.

 

분명 작년 구두로 계약할 때는 올해 7월까지 있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아줌마도 흔쾌히 "그러마."라고 했지만 월세 안밀리고 꼬박꼬박 내며, 술도 안먹고 시끄러운 소리도 안내고, 가끔 드시라고 귤도 가져다주는 착실한 ○○○ 호 아가씨의 계약기간이 내년 7월로 바뀌어 있었다. 올해까지라고 말할수도 있었겠지만, 나도 당장 집을 구하러 다니기도 힘들 것같고 (물론 이 집 이사올때는 집본지 5분만에 결정. 내가 이렇게 쇼핑할때는 남자답다.), 힘들다기 보단 귀찮고, 짐이 제법 늘어 이사도 만만찮게 됐으며, 이 동네가 이제는 좀 익숙해서 시무룩한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난 연희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언의 계약연장에 OK.

 

그렇지만 오늘 오후까지 이렇게 계속 마음이 덜컹거리는걸 보니, 과연 서울생활에 이제는 좀 지치기도 했거니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기도 하고 내가 내년까지 여기에, 정확히는 이 집에 머무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한 것이 동네를 좀 옮겨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욕심을 좀 더 부리자면 회사를 좀 옮겨 보고 싶기도 하며, 대뜸 연애를 해야겠다고 조바심 내는 꼴이 이 모든 고민을 모른 척하고 다른 자극에의 집중을 통해 한번 버텨보리라! 하는 마음도 슬몃 드는 요즘.

 

아무튼 온전한 내 집에 대한 욕심이 이렇게까지 드는 것은, 내 소중한 택배박스를 버리라고 종용하는 아줌마 때문이다. 세면대 유리 떨어진 건 언제 고쳐주시려나요? 관리비도 꼬박꼬박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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