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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씨발넘아

 

 

우리 선배는 술먹으면 꼭 나에게 전화해서 "씨발너마~~~" 라고 욕을 한다.

그 욕이 꼭 밉지만은 않은 것은, 나를 생각하는 애정이 담뿍 느껴져서다.

(그렇지만 맨 정신에도 욕을 자주하는데, 그 욕이 꼭 밉지만은 않은 것은 내가 항상 더 크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낄낄.)

 

아무튼 선배는 앞날 창창한 내가 안쓰럽고 안타까워 그러는지

"진짜 네가 하고 싶은걸 해." 라는 말을 술먹고 자주한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자주한다.

깊은 밤, 선배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 저 깊은 곳에 애써 꾹꾹 눌러두고 외면한 불씨가 살랑살랑 살그머니 고개를 든다.

 

스무살 초중반에는 '진짜 네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가 담긴 책을 많이 봤다. 쉽게 뜨거워졌고, 진짜 네 인생을 찾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에 대해 쉽게 자괴했고, 다시 쉽게 해이해졌다. 쉬이 달아오르고 쉬이 식으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그냥 보냈다. 가슴을 따라가, 네 영혼의 목소리를 들어봐, 네가 진짜로 뭘 할때 즐거운지 생각해 봐. 나는 내 영혼의 목소리도 안 들리고, 내 가슴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늘 피곤해서 자주 누워 있었고 누워 있을때 즐겁지는 않아도 편했다.

 

김밥 한 줄을 뚝딱하고 3월의 깊은 밤, 고요히 홀로 앉아 생각해보건데

왜 모든 (더 나은 20, 30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책은 '개개인이 저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까? 정말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인생에게는 다들 '가짜'라는 이름표를 그렇게 쉽게 붙일까? 남의 생이라서 그렇게 객관적이고 그렇게 쉬운건가. 문득.

 

그러니까 문득 "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없어요" 라는 목소리가 생각나고, 드러내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조용히 경멸했던 내 마음속 목소리가 생각난다. 내가 뭐라고. 참.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밤 풍경에 조용히 불을 밝힌 꽃집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저것이 나의 진짜 생인가' 가늠해보기도 하고, 자그마하지만 제법 근사한 메뉴를 내놓는 조용한 까페 앞을 지나며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 갸웃하고 기웃해본다. 그러면서 문득 시급한 구직의 난 앞에, 시급 5천원이 절실했던 절박한 구직자의 처지로 되돌아가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지금 내 현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진짜 원하는 삶이 뭔지는 진짜 잘 모르겠는데, 이게 현실에 대한 도피인지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 문득문득 내가 정한 인생의 정의를 읊조린다. 좋은 사람들, 좋은 곳, 맛있는 음식.

 

어떤 이들의 삶은 방향을 정해놓고 한 걸음씩 쌓아가는 것이라면, 어쩌면 내 삶은 아무 방향도 없고 이리저리 꽤 적극적으로 헤메이다가 어느 날 문득 어딘가에 도착하는 형태에 가깝지 않을까. 지금 나에게 '방향'을 정하라는 명령은 너무 어렵다. 나의 슬렁슬렁 설렁설렁한 움직임이 내 삶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선배에게 설명할 수 있을때까지 난 아마 줄기차게 씨발넘아가 되어야겠지.

 

 

* 인생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한

좋은 사람, 좋은 곳, 맛있는 음식.

 

(가장 간단한 정의 앞에서도) 인생은 너무 어렵다.

 

 

* 소름.

이 글을 포스팅한 시각이 11시 43분이었는데, 정확히 5분 뒤에 감자기 어머니로부터 이런 근사한 시가 도착해서 깜짝 놀랐다.

역시 이 세상의 부모님들은 자식에 대한 예민한 촉이 있으며,

자식이 '바다 위의 미역처럼 둥둥 떠다니며 살꺼야' 라는 포스팅을 하자마자

이를 저지해야겠다는 경보음이 빼용빼용 울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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