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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하자병 : 생산성보다는 생명성

 

 

털썩.

 

옷을 한껏 차려입고는 침대에 그만 누워버렸습니다. 한 손으로는 바쁘게 머리를 말리며, 곁눈질로 시계를 흘끔흘끔 보며 가는 시간을 안타까워 하면서 바쁘게 모임 준비를 하다가, 몇 번이나 멈추고는 '굳이 이렇게까지 바쁘게 살아야할까?' '아니야, 그래도 가자' 를 반복한 끝에 그만 누워버렸습니다. 나 좋자고 하는 공부인데, 뭘 위한 공부인지 알 수게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평일이면 업무 일정에 쫓겨 시간을 몇 토막이나 쪼개어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퇴근 후에 바쁘게 어딘가로 또 쫓아가고 - 운동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곧 마감하는 서점으로 달려가고 - 집으로 돌아옵니다. 주말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주5일 평일의 끝무렵이면 '아 이제 주말이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어보지만, 주말에는 격주에 한번 있는 스터디를 해야하고 한의원에도 가야합니다. 보통 주말 새벽이면 눈을 번쩍뜨고는, 주5일간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이런저런 집안일을 처리합니다.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직 박스도 뜯어보지 못한 택배의 내용물을 확인하지요. 내 손으로 밥 한끼 못 해먹는 바쁨을 절감하면서 뭐라도 해먹고 싶지만, 역시 뭘 해먹기에는 시간에 쫓기는 나머지 급하게 뭔가를 후다닥 꺼내먹고는 출동합니다. 출동!

 

곁눈질로 시계의 초침을 쪼개가며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이 어제는 문득 화가 나더라고요.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른 10시부터 1시까지 세 시간 수업을 듣고, 카페에 가서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말끔한 기분으로 데이트를 하자! 였어요. 고즈넉한 사찰에 가서 빗 속에 핀 연꽃도 보고 마음을 좀 달랠 요량이었지요. 그러나 일단 모임을 포기해버렸고, 일찍 일어났으면서도 준비를 더디해 시간에 쫓기고 쫓기다 결국 그 스트레스로 모임을 포기해버린 바보같은 내 자신에게 충분히 화가 나고. 밀린 업무를 미리 해볼까 싶지만 집의 노트북과 인터넷에 여의치 않아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버벅 거리기만 하다가, 노트북을 창 밖으로 내던질 것만 같아서 전원 종료. 남자친구에게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그도 일정이 있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빈틈을 불안해하면서 자꾸만 시간의 생산성을 따지는 내 모습에 또 화가나고. 생산성보다는 생명성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싶었는데. 참 못났다.

 

침대에 털썩 누운 와중에도 마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모임을 가지 않았지만, 모임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해내어서 이 기분을 털어버려야지. 침대에 누워서 명상을 하려고 했지만 이 복잡한 마음으로 잘 될 턱이 있나요. 실패.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의 깊은 아름다움에 매료될 준비를 하지만 역시 실패. 갑자기 몇 주부터 계속 먹고 싶었던 쿠키를 구워야겠다는 마음이 살짝 일어나지만 번거로운 준비과정과 엄청난 설거지를 미리보기 하면서 또 실패.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기를 바라면서도, 자꾸만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몇 주동안 미뤄왔던 분갈이를 해주었습니다.

 

마땅한 분이 없어 플라스틱 용기의 뒷부분에 칼과 가위를 총동원해 얼기설기 뚫어준 뒤, 거름망이 없으니 거름망 대체할만한 것을 또 한참 찾아 헤매이다가 쇠수세미를 잘라 쓴답시고 가위로 쇠수세미를 낑낑 잘라봅니다. 작은 쇠수세미 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하마터면 손가락에도 박힐뻔. 세수할 때 쓰던 거품망으로 최종 낙점했으나 플라스틱 화분에 거품망을 거름망 대용으로 깔고 흙을 채우고 물을 부어 마무리하고 나니 싹이 영 시들한 기분이어서, 혹시 거품망에 묻어있을 수도 있는 세제성분 때문인가... 하고 잠깐 걱정에 빠졌어요.

 

비는 시간에 생산성보다는 생명성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답시고 분갈이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약속시간에 늦은데다 남자친구 일정도 조금 지체된데다 여차저차한 일이 생겨서 지하철역 앞에서 남자친구에게 냉랭한 살기를 퍼붓고 - 사실 모임도 가지 못했고, 주말까지 회사 업무를 붙들어야 하는 것은 온전한 나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잘 알죠- 말았습니다. 고즈넉한 운치의 사찰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도 못했답니다. 흑 - 카페에서 세시간동안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업무를 마쳤습니다. 업무를 하다가 너무 화가나서 '씨발!!!!' 이라고 욕을 한번 하고, 옆옆 테이블에서 떠들던 중학생들에게 '조용히 좀 해주세요!!!' 하고 역시 냉랭한 살기를 담아 말했습니다.

 

내일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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