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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미녀와 야수

 

일전에 한번 KTX를 간발의 차로 놓쳤을 때, 엄마가 이런 말을 해줬다.

'드디어 놓쳤구나!'

 

오늘은 무려 40분이나 일찍 역에 도착했다. 잠을 별로 못 잤는데도 그리 졸리지가 않아서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대구에 도착. 1월 여행다녀오고 처음 오는 것이니, 두달 반 만에 온다. 날이 흐리다. 동대구역 앞에 번듯하게 자리잡은 신세계 백화점 - 너무 빨리 지어서 날림 공사라는 말이 있더라 - 만 제외하면, 대구는 그래도 참 언제나 그대로인 도시이다. 내가 아홉살 때 짓다 말았던 그 커다란 오피스텔 건물도 아직 그대로이고, 대학 다날 때 생겼던 비싸고 못한다는 치과도 여전히 성업중이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종종 가던 시장도 아직 그대로이고, 주말이면 종종 시켜먹던 반점도 이른 아침부터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보물을 떠나 가장 멀리 떠났다가 자기의 집에 묻혀있었던 보물을 발견한 어느 사내의 이야기다. 어릴 때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의 감상평 한마디는 '븅신'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득 채워야 비울 수 있고, 가장 멀리 떠나야 비로소 진실로 돌아올 수 있음을. 답답하고 지겨워 죽을 것 같던, 거실에 걸린 먼지 뽀얀 액자처럼 영원히 거기에 머물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섭고 두렵던 일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에,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빈 집. 엄마가 솥 그득 해놓고 간 떡볶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200개나 되는 TV채널을 하나하나 돌린다. 사람들이 종종 TV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으냐, 적막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천만에. 200개 채널 중에 단 하나도 볼 것이 없다. 몇 번이나 심술궂게 틱틱 돌리다가 '미녀와 야수' 애니매이션에 눈길이 멈춘다. 아주 꼬맹이 때 너무 좋아하던 만화. 마침 미녀가 야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 남겨진 야수가 절망에 겨워 하는 장면이다. 야수를 떠나고 나서야 그를 좋아하는 자기의 마음을 비로소 깨닫고 돌아온 미녀. 그 사랑에 멋지게 보답하는 야수의 숨겨진 미모. 마법이 풀려 야수가 다시 왕자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우와씨, 미남!' 이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고전은 역시 고전인지라. 세월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 어찌 저 미모가 아직까지 먹힌단 말인가. 찐한 키스신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하나뿐인 동생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 왔나.

/ 어.

/ 아가씨 사진 보자.

/ 안된다. 나의 소중한 그녀다.

/ 미친놈아 빨리 비도.

 

스튜어디스 출신이라는 그녀는 참 예뻤다. 그녀의 맘에 들기 위해 눈썹까지 열심히 그리는 우리 남동생. 태생부터 경상도 사내라 눈썹 연필을 직접 사질 못해서 서울 있는 누나에게 전화해 택배 부탁을 하던 그 눈썹연필이다. 보기 안쓰러워 내 앞에 마주 앉힌 다음, 눈썹 숱정리를 해주고 눈썹을 그려주었다. 가까이서보니 이른 흡연의 폐해때문인지 얼굴이 영 말이 아니라서, 비비크림도 발라주고 컨실러도 톡톡 두드려주었더니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면서 만족해한다.

 

/ 오늘 고백해야겠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다시 오겠나.

 

셔츠를 바지 춤에 넣었다 뺐다. 셔츠 단추를 풀렀다 잠궜다 하는 그애를 보면서 흡족. 사랑할 수 있을 때 실컷 사랑해보렴. 손을 빠빠이 흔들어주고 자리에 털썩 누웠더니, 왜 이미 애딸린 유부녀 마음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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