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에 슬금슬금 벚꽃 사진이 올라온다.
며칠전, 아버지가 전화로 "라일락 꽃이 피면 그 때 집에 올래?" 란다.
사람들 입에 다시 꽃이 오르내리는, 봄. 봄이 오고 있다.
너는 비행기를 타고, 난 웹툰을 보고
우짜다가 얼굴 한 번 못보고 친구의 연을 맺은 이가 있다. 소소하게 하루의 근황을 묻고 답하며 지낸지 얼마 안됐는데, 그 친구가 오늘 아침 일본에 여행을 간다며 "지금 비행기 타는 중이야." 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물끄럼. 나는 어제밤에 목이 말라 급하게 마신 버블티가 체했는지, 집에 와서 한참을 잠못자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 살짝 잠들었다 다시 깨어나서 친구의 메세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물끄럼.
그리고 되게 당연하고 바보같은 소리지만 '와, 정말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사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누워서 웹툰을 보는데,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날아가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철야작업으로 이제 퇴근하는 길일 것이며, 어떤 누군가는 슬퍼서 밤새 울고 있을 수도 있겠지. 나는 가끔 그게 너무너무 신기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인데,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남들과 똑같은 시간을 살기위해 아둥바둥 하는 모습은 더더욱 신기하고.
엄마, 정답이 없으면 그냥 편하게 찍자
학창시절에 나는 시험 스트레스가 너무너무 많은 예민한 학생이었다. 고3때는 신경과민이라, 툭하면 아팠고 수능을 두어달 남겨두고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수시로 닝겔을 맞았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입학하던 일곱살부터 열여덟 먹던 해까지 인생의 1/10 을 장장 시험을 치르기 위해 살았으니 그 말미에는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때는 나 몸 아픈 시간에 공부하고 있을 전국의 수많은 경쟁자들이 생각나서 아픈 내 몸을 많이 원망했었다.)
본격적인 시험 스트레스는 중학교 들어가면서 시작됐는데, 같은 반에 전교 1등하던 친구도 있고 선생님이나 학우들이 은근히 그 친구와 나와의 경쟁을 부추기던터라 언제나 몹시 피곤했다. - 이상하게 고등학교때도 우리반 전교 1등이 내 짝이라 게속 피곤했다 - 수행평가 하나를 하더라도 그 친구가 꼭 내 점수를 살폈으며, 시험을 치르고 나면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그 친구와 내 점수를 말했으니까. "야, 니 그걸 틀리면 어떡하노! 하나만 더 맞추면 걔 이길 수 있는데. 니도 전교 1등 한번해봐야지!"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싶었고, 얼마나 걔를 이겨먹고 싶었겠는가. 집에 오면 나는 늘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질렀다. 악! 악! 악! 악! 나는 왜 문제 하나를 더 맞추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 쉬운걸 틀렸을까. 나는 왜 이렇게 병신같을까. 나는 왜... 나는 왜... (인생 10년동안 '나는 왜'를 품고 살았다. 정말 내 인생이 다 너덜거렸다.)
시험 때문에 어머니에게 온갖 짜증과 피로를 하소연하면, 어머니가 빨래를 개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지금은 니 시험이 어렵다고 하지. 커봐라. 인생에는 시험보다 더 어려운게 많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못 받아들였다. 그래서 눈 앞의 내 시험만 보였나보다. 돌이켜보면 그 때, 우리 엄마도 참 피곤하고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있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하염없이 눈물나는 시험을.
아 여러모로 씨부럴
신이 인간을 빚었고, 인간을 빚어내는 틀이 있다면 - 예컨대, 그것이 붕어빵 틀이라면 나는 그 틀에 꼭 들어맞는 완벽한 붕어빵이 되고 싶었다. 꼭 들어맞는 너무너무 예쁜 붕어빵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시험을 쳤는데, 모두가 좋아하는 상위 1%의 붕어빵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너무 예쁜 붕어빵이 되기에는 반죽이 조금 묽었다. 그래서 집 앞 골목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11월 칼바람에 눈물이 실렸다.
"엄마, 나 미대 가고 싶어."
"서울대 아니면 서울 못 보낸다."
"그걸 왜 지금 말해주는데? 나 서울대 보내고 싶은거였어?"
"집 앞에 학교에 가라. 중국 보내줄께."
잡지에 나오는 멋진 청년들이나 존경하는 여성상에 들어가는 여자들처럼 나도 미대 안 보내주면, 서울에 집 안해주면, 가출을 하거나 삭발을 하거나 토익학원 다닌다고 돈을 띵겨먹고 몰래 미술 학원을 다녀야했을까. 나는 조금 묽은 사람이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시험을 치르고 있는 엄마에게 또 하나의 과목을 추가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내 인생에게도 더 이상 시험을 치르라고 말을 못하겠더라. 1년만 더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향해가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게 바로 한계를 확인하는 그 순간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을 쥐어짜내봤자 여기가 마지노선이면 너무 끔찍할 것 같았다. 아 나는 서울대 못가는 인간이구나. 재수까지 했는데 서울대못가면 어떡해.
흔히 대학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이 갈린다(고들 한다.) 나는 그리 나쁘지는 않은 집 앞의 대학에 갔고, 나와 비슷하게 성적을 유지하던 친구는 재수를 해서 서울대를 갔고, 공부는 못하지만 집에 돈이 많은 친구는 '의사 남편 잡으라'며 부모가 서울의 어떤 사립대에 보냈다. 늘 '회사원이 되고 싶다' 말하던 또 다른 친구는 서울대를 갈만한 성적이 됐는데 서울대를 포기하고 지방에 남았다. 집에 돈도 많고 그림도 곧잘 그리던, 나의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었던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좋다는 알만한 미대에 들어갔다. 아 씨부럴.
가끔 (사실은 자주) 욕이 튀어나오지만
그래도 시험지가 참 아름답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우리나라.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너와 내가 다르니까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겨먹은걸 어쩔껴. 어머니가 조용히 수건을 개며 가끔 말했던 "그래도 니가 치는 시험이 쉽다." 라는 그 한마디가 요즘 문득 생각난다. 내 인생의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라기보다는 그냥 정말로 내 인생의 답안지를 생각하면 별들이 활짝 피어있는 새까만 밤하늘이 생각난단 말이지.
재수를 해서 서울대를 간 친구는, 엘리트코스를 촥촥 밟아서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고 그녀의 남자친구 역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지금 변호사라고 하던가. 아, 얼마전에 결혼식에 다녀왔었지. 이 부부와 친하게 지내야겠다. (쿡쿡) 의사 남편 잡으러 서울간 친구는, 곧 시아버지 될 분이 택시를 하는 평범한 남자와 사귀고 있다. 이 친구가 참 가관인데 고등학교때 부터 줄곧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남자를 볼 때 집안을 보고, 그 다음에 장남인지 아닌지 보고, 시부모 계신지 보고..." 허구한날 보는 타령만 하더니, 아무것도 안보고 연애 잘 하고 있다. 장남은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하물며 장남이다. 지방에 남아 교편 잡는 친구는 애들이랑 치고 박고 하면서 잘 지내고 있고, 미대 간 친구는 의외로 미술을 다 때려치우고 어느 회사의 영업직으로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버스를 타고 연대 앞을 지날때마다 부러움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살고 있다. (학교 이름이 부럽기도 하지만, 내 20대의 주 무대가 신촌, 홍대였다면 정말 얼~~마나 신나고 재밌었을까! 크아~ 지나가버린 세월이여!)
아무튼 이 놈의 인생이란 밤하늘의 별처럼 너무 넓고 아름답고 막막한 것이어서, 앞으로 나는 또 많은 순간들을 살고 사람들을 지나며 밤하늘에 나만의 별자리를 엮어나가겠지. 여태껏 밤하늘에 그려온 내 별자리는 어떤 모양일까? 凸 ? (푸하하) 가운데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조금씩 옮기면서 살고 싶다. 먼 훗날 돌아보면 '따봉'으로 남아있게. 밤하늘의 따봉. 캬. 닉네임 바꿀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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